#10주년브런치작가의꿈
유년시절 몽골서 살았다는 어느 뮤지션의 노래 ‘파노라마’의 가사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
인생은 짧고 쥐뿔도 없는 게 스쳐가네 파노라마처럼
이 멋진 가사를 쓴 그의 버킷리스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건 뭘까.
내게도 15년 된 버킷리스트가 있다. 001. 5개 국어를 능숙하게 한다로 시작하는 허황되고 안구에 습기 차는 이것은 2010년에 작성되었고, 무려 500개의 하고 싶은 일이 적혀있다.
스물일곱. 7년째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다.
학과사무실에서 "필수전공 2개가 F인데, 졸업은 안 할 거니?" 같은 핀잔을 들었다. 전공을 살릴 생각이 없었기에 '재수강으로 C만 맞으면 다행'이라 낙관했다. 정작 열심히 들었던 것은 <리더십과 진로개발>이라는 교양수업. 비록 리더가 되거나 진로를 정할 수는 없었지만 재밌는 강의로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 기말과제는 '500개의 버킷리스트 쓰기'.
“500개 금방 쓸 거 같지만 다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 채우면? 무조건 A+입니다.”
학점을 조금이라도 높여볼까 500개를 썼고, A+를 받았다. 이후 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백수가 되었고, 한쪽 눈을 잃었으며, 이듬해 도피성 해외취업을 했다. 버킷리스트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서른두 살, 해외살이 5년 차
퇴근하고 카페에서 새벽 2-3시까지 여행책을 쓰던 때다. 출판사 30여 군데에 투고를 하고 연락이 온 단 한 곳과 계약서를 쓴 참이었다. 열정이든 최선이든 뭐든 보여주자. 새벽까지 문을 여는 곳은 시샤카페 밖에 없었다. 잘 피지도 못하는 물담배를 피워대며, 레드불을 들이부으며, 열심으로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글을 정리하려 외장하드를 열었다가 우연히 잠든 '버킷리스트'를 발견했다.
"허허 참. 5개 국어? 무슨 수로?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 이 아가씨야.'
허무맹랑해 보이는 리스트를 내려보다 겨우 다섯 번째 만에 스크롤을 멈췄다.
005. 5년 뒤에 에세이집과 여행기를 책으로 낸다.
버킷리스트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 중이 아닌가.
물론 5년 뒤 서른두 살이 아닌, 서른셋에 책이 나왔다는 것.
에세이나 여행기가 아닌 가이드북이었다는 디테일은 달랐지만.
나는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1-2년에 한번씩은 버킷리스트를 열어보게 됐다.
지금까지 몇 개나 이뤘을까. 한 2~30개쯤?
형편없는 스코어지만, 소름 돋게 꼭 맞아버린 버킷리스트가 한두 개가 아니다.
383. 길이 있는 곳으론 절대 가지 않기 (가지 못했지....)
442. 열쇠 세 개 없는 남자랑 결혼하기 (단 한 개도 없었...)
445. ‘부부가 정말 많이 닮았네요’라는 소리 들어보기 (매일 듣는 이야기...)
이쯤 되면 데스노트 수준이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 죽어나가지는 않지만, 쓰면 뭐 하나는 이뤄지게끔 젊은 날의 내가 주문을 걸어놓은 것 같다.
마흔둘, 지난 6월
집 앞 도서관에서 진행된 8주 에세이 수업을 마치며 강사는 우리에게 당부했다.
"독자가 있는 글을 쓰세요. 멈추지 않고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이곳은 나의 시샤가 되고 레드불이 되었다.
모두가 잠든 밤, 찰싹 붙었던 눈꺼풀을 떼어내며 쓴다.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이야기가 봇물 터져 흐른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눈물콧물을 흩날리며 무엇이든 써보기로 한다.
거창한 꿈이 아니어도 좋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계속 쓰는 것.
걷다가 멈추어 뒹구는 때도, 쓰다가 포기하던 때도 있었으니
계속 쓰는 것만으로 내게는 별 볼 일이고, 꿈인 셈이다.
브런치에서 열심으로 그것만 하더라도, 난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완성할 수 있다.
버킷리스트 거의 말미에 있는, 20대의 내가 걸어놓은 강력한 삶의 주문과도 같은.
496. 베스트가 아니라 스테디 하게 살기
그렇게 살다 보면 앞서 말한 노래가사대로 인생은 더없이 짧고, 쥐뿔 없는 것도 너무 잘 알게 되겠지만,
인생이 그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만큼 별 볼 일이 또 있나 생각하며 오늘도 브런치에 글을 쓴다.
**대문 이미지 : 이찬혁-파노라마 공연 JTBC K-909 221022 방송 캡처
**연도 표기 오류로 글을 한 번 수정했습니다. 버킷리스트는 제가 학교를 다녔던 마지막 학기 2010년도에 작성한 것이라 15년이 된 파일입니다. 최초의 글과 파일 정보 이미지에는 2012년이라 적혀있는데 외장하드를 교체하며 생성된 날짜인 것 같아요. 글 마지막 부분에 제 나이가 적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전달해야 할 것 같아 수정했습니다.
에세이 수업 때 퇴고 시 '정확한 사실 전달'에 유념하라고 배웠는데, 이 기회에 또 한번 숙지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