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 (2)
"하영이는 놓고 가. 너만 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추태다.
재현의 저 말은 정말이지, 구리다.
하지만 당시 나는 재현이 나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고 생각했고, 지혜 언니에게 우월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언니가 라면 먹으러 오고 싶다고 했던 그 집에 언니 말고 내가 남게 될 거야.' 하는 웃긴 마음.
다만, (정말 다행히도) 내가 그 자리에서 재현의 집에 혼자 남는 건 이상해 보일 거란 인식은 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재현을 두고 언니를 따라나섰다.
언니는 나를 집에 데려다 놓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참을 자지 않고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재현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번 더 술자리를 가졌다.
재현은 똑같이 이상한 농담을 막 던져댔고, 지혜 언니는 그런 말들로부터 날 보호했으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잘 웃었다.
나는 재현이 나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좀 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날 재현의 집에 내가 남겠다고 했으면 진짜 이상했겠다 생각하며 그러지 않은 것에 위안 삼았다.
어느새 태하 오빠와의 이별이 다가왔다.
긴 만남과 달리 이별은 참 싱거웠다.
내가 먼저 이별을 고했고, 태하 오빠는 별 저항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재현은 나의 이별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리고 이별엔 '술'이라며 술자리를 주최했다.
나는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술자리를 나갔고 지혜 언니를 찾았다.
하지만 그 술자리에 지혜 언니는 없었다. 물론 민수 오빠도 없었다.
재현은 술을 한잔 들이켜더니, 나에게 물었다.
"나 때문에 태하랑 헤어진 거야?"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사실 이별의 이유 중 재현에 관한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재현과의 지금 관계조차 유지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직감이 맞았는지, 재현은 다행이라며 웃었다.
우리는 지혜 언니가 자취팸에 들어오기 전의 무드로 술을 마셨다.
재현은 시답잖은 장난을 쳤고, 나는 웃으며 이를 받아줬다.
"너 내 번호 뒷자리, 9026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아니요. 뭔데요?"
"너, 너는 진짜 못됐다. 너는 오빠 생일도 모르냐? 내 생일, 9월 26일이잖아. 그러니까 9026이지."
"아아, 오 그렇구나. 좋네요, 번호."
"너도 바꿔. 태하랑 헤어진 기념으로. 너 생일 6월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내 생일? 6월 19일이에요."
"네 생일을 오빠가 모를 리가 있냐. 6월 19일, 6019로 하면 되겠네. 9026, 6019, 나랑 짝꿍. 이렇게 하면 우리 둘은 서로의 생일을 평생 잊지 않을 걸?"
그날은 재현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재현은 우리 집 현관까지 날 따라왔고, 급기야 방안까지 들어와서 내게 입을 맞추고는 나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했다.
나는 재현이 창피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배려하는 마음에, 너무 취해서 몸을 못 가누는 듯이, 그렇게 잠든 척을 했다.
재현은 내 옆에 누워 자다가 새벽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재현이 집에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잠에 들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재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는 문자였다.
나는 우리의 사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태하 오빠와 헤어졌고, 재현은 그런 날 불러서 술을 같이 먹었고, 자신과 같은 의미를 갖는 핸드폰 번호에 대해 이야기했고, ..., 그리고 우리는 함께 잤지.'
나는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6019.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옷 중 두 번째로 예쁜 것을 입고 재현을 만나러 나갔다.
우리는 순댓국집에 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아, 어제 술 많이 먹었나 봐, 우리. 머리 아프다. 그렇지?"
재현은 나를 어색하게 대했다.
나는 내가 예상한 그 무드가 아니구나, 깨달았다.
우리는 섹스는 했지만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순댓국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잤다.
그리고 재현의 연락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나와 재현의 사이가 멀어진 것을 알게 된 지혜 언니는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재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지혜 언니는 나를 가여워했다.
언니는, 재현 같은 스타일의 남자는 너처럼 착하고 순한 애가 대하기 어려운 부류라고 했다.
또, 재현이 자신에게도 몇 번 치근덕댔지만 자기는 넘어가지 않았단 말도 덧붙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후로 두 해 정도, 재현은 자신의 생일 전후로 전화가 왔다.
"너, 내 생일을 까먹을 수가 있어? 어떻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가 없냐?"
전화를 받은 첫 해엔, 미안해요, 밥 살게요, 하며 약속을 잡았으나 결국 만나지 않았고,
두 번째 해엔 빈 약속조차 잡지 않고 어영부영 통화하다 끊었다.
그렇게 재현과의 관계는 끝이 났다.
몇 달 전, 재현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웨딩 촬영 사진이 올라왔다.
신부는 정말 참하게 생긴 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진들이 모두 내려갔고 흔적도 없이 삭제되었다.
이혼, 아니 파혼한 건가 싶다가도, 설마 아닐 거야 싶다가도, 재현은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가도, ...,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꺼냅니다.
오래된 기억과 감정들을 지나, 여전히 나인 나로 살아가며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