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 (1)
이십 대 초반, 태하 오빠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등산 동호회의 이름은 '산사랑'이었다.
그렇다. 이름에서부터 풍기는 아재 냄새로 알 수 있듯이 산사랑은 대학교 '졸업생' 모임이었다.
하지만 당시 산사랑은 신규 인원 모집에 애먹고 있었고, 다른 학부 출신 대학원생들이나 졸업하기 전의 학부생들까지도 너그럽게 수용했다.
또, 한 회원이 지인이라고 데리고 온 사람들 중에서도 은근슬쩍 회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사실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성격의 동호회 같기도 했다.
내가 태하 오빠와 한창 동호회 활동을 했을 당시, 이 모임을 이끄는 주축은 공대 대학원생들이었다.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했던 재현 오빠, 여전히 대학원 다니고 있을 것 같은 만년 대학원생 스타일 민수 오빠, 못 봐주겠는 얼굴로 잘난 척 엄청 했던 상진 오빠, 배우 누구 닮았는데 아직도 누구 닮았는지 모르겠는 준우 오빠. 이들은 모두 공대였다.
이들은 나보다 나이가 꽤 많았다.
모두 열 살 내외로 차이가 났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동호회 안에서 나는 여자가 아닌 여동생의 위치였다.
동호회 막내였던 태하의 여자친구이자 귀여운 여동생.
재현을 처음 본 건 산사랑에 나간 지 몇 번 안 됐을 때였다.
재현은 외모가 준수한 편이었다. 키는 좀 작았지만 얼굴이 귀여웠다.
하지만 그는 생김새와 달리 자신이 엄청난 마초이며 남자답다는 식의 제스처를 잘 취했다.
나는 재현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좋았다.
태하 오빠 손을 잡고 등산을 했지만 눈은 저 앞에 있는 재현의 모습을 담곤 했다.
반대로, 그때 재현에게 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첫 만남에서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그 뒤로 몇 번 등산을 같이 할 동안에도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재현과 친해지게 된 건 산사랑 송년회 자리에서였다.
재현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그는 테이블마다 돌면서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을 걸었다.
주로 몇 살이냐, 어디 사냐, 무슨 과냐 등 호구 조사 비슷한 거였다.
재현은 나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고, 나는 몇 살이고, 학교 앞에 살고 있으며, 사회학을 전공한다고 대답했다.
"어? 나도 학교 앞에 사는데? 인연이네. 친하게 지내요, 우리."
그날 이후로 나는, 재현의 표현에 의하면, "자취팸"이 되었다.
초기에 자취팸 멤버는 넷이었다. 재현, 민수, 상진 그리고 나.
모두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상진 오빠는 내가 봐도 좀 밥맛 떨어지는 부류였기에 두 오빠들도 부르기 싫어하는 눈치였고, 보통은 재현, 민수, 나 이렇게 셋이 만났다.
처음에 재현은, 다른 오빠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귀여운 여동생 보듯이 했다.
당시 나는 행정고시를 준비 중이었는데(고시생을 흉내 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재현은 뜬금없는 때(아주 이른 새벽이나 깊은 밤, 가끔은 오후 두 세시쯤)에 연락해서는 영양가 없는 응원을 자주 했다.
"공부 잘 되어가? 오빠가 도와줄까?"
"고시 공부 힘들지? 근데 또 별 것 아냐. 내 친구, 머리 똘빡인 애도 3년 하니까 그냥 붙더라."
"태하가 고시 공부하는 여친 잘 챙겨? 태하가 너한테 잘 못하면 나한테 일러. 내가 아주 그냥 혼쭐을 내줄게."
재현은 종종 나를 불러내 밥도 잘 사주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에게 여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이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했다.
그를 만나러 갈 때면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예뻐 보이는 옷을 입었고, 가끔은 굉장히 짧거나 파인 옷을 입기도 했다. 재현은 그럴 때면 (정말 여동생 대하듯이!) 고시생 옷차림이 그게 뭐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그런 꾸지람도 좋았다.
그렇게 편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더라도 자주 보는 게 좋았다.
그러던 차, 태하 오빠와의 연애 기간은 꽤 길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관계가 점점 싫증 났다.
하지만 그 관계를 끊어낼 용기는 없었다.
재현은 그런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태하 오빠와의 사이가 시들할 때면 재현은 이를 알고 있다는 듯,
동네에서 술 한잔 하자며 나를 불러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흔쾌히 재현을 만났고, 태하 오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그러면 재현은 나를 여동생 이상, 여자로 보는 듯한 말을 종종 꺼냈다.
"하영이는 태하에겐 좀 아깝지."
"태하랑 헤어지고 오빠한테 와. 오빠가 잘해줄게."
재현은 워낙 진담과 농담을 구분 없이 막 던지는 스타일이었기에 나는 그의 농담을 웃어넘겼고,
그는 그런 나를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무렵, 자취팸에 새로운 멤버가 생겼다.
지혜 언니.
지혜 언니는 재현보다도 한 살 많았다.
지혜 언니는 나를 예뻐했다. 나도 지혜 언니가 정말 좋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나보다 예쁘고 매력 있는 여자라면 질색이다.
반대로 너무 못생겼거나 매력 없다고 느껴지는 여자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여자의 폭은 굉장히 좁다.
지혜 언니는 그 범위 안의 사람이었다.
지혜 언니는 객관적으로 예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몸매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때 매력적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지혜 언니가 합류하고 나서 자취팸은 더욱 흥했고, 술자리가 더 자주 만들어졌다.
나는 재현과 단둘이 갖는 술자리만큼이나 지혜 언니가 낀 셋의 술자리가 좋았다.
지혜 언니는 나와 재현 사이의 관계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재미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선, 나와 재현 사이의 일관된 무드를 단숨에 다이내믹하게 만들었다.
지혜 언니를 만나기 전, 나는 재현의 주도권에 휘둘리는 편이었다.
나는 주로 재현의 말을 듣거나 이에 호응했고, 그것이 어린 나에게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지혜 언니는 이 무드를 깨뜨렸다.
재현보다도 나이가 많은 그녀는 내 보호자를 자청했다.
재현이 나에게 시답잖은 농담, 예를 들어 "오빠한테 시집와. 오빠가 예뻐해 줄게." 같은 말을 하면,
지혜 언니는 "너 같은 놈한테 하영이가 뭐가 아까워서 시집을 가냐? 하영아, 귀 씻어."라고 대응해 줬다.
그러면 나는 새로운 이 상황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재미있었다.
한편, 지혜 언니는 재현에게 여자처럼 굴기도 해서 내 질투를 유발했다.
나는 그들에 비해 나이가 많이 어렸기에 그들은 종종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가끔 수위가 높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둘은, 하영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며 나중에 둘이 따로 하자는 둥 화제를 돌렸고, 지혜 언니는 그럴 때마다 "재현아, 너네 집에서 둘이 라면 먹으면서 얘기할래?" 식의 섹드립을 날렸다.
나는 그게 너무 신경 쓰였다.
우리가 다 같이 재현의 집에 간 날도 아마 그런 섹드립이 난무했던 어느 술자리 이후였을 것이다.
재현은 2차로 좋은 술을 마시자며 나와 지혜 언니, 민수 오빠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이미 많이 취해있었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혜 언니만 재현의 집에 가는 건 싫었고, (민수 오빠는 좀 놀다가 내일 실험하러 일찍 대학원 나가봐야 한다며 빠질 게 분명했다.) 무리해서 함께 재현의 집에 갔다.
재현의 집은 근사했다.
코딱지만 한 내 월세방보다 세 배는 넓은, 베란다가 딸린 투룸 전셋집이었다.
재현은 침대 앞 좁은 공간에 우리를 동그랗게 앉히고, 양주를 꺼내 가운데에 놓았다.
취한 나는 꾸벅꾸벅 졸았고, 지혜 언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날 침대에 눕혔다.
그렇게 좀 잤을까, 취한 지혜 언니가 집에 가자며 날 깨웠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재현이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하영이는 놓고 가. 너만 가."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꺼냅니다.
오래된 기억과 감정들을 지나, 여전히 나인 나로 살아가며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