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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재 Feb 16. 2024

무제 (아직은.)

무지성으로 써 내려가보는 나, 주변, 그리고 다시 나.

매번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으면서도 쓰기가 쉽지가 않다.

그 이유가 단순히 나의 게으름이 되었든, 아니면 여러 생각들을 글로 옮기지 못한 나의 무지함이든.

그렇게 하루, 또 하루 밀려간다.


이직한 직장에서 어느새 1년이 지나고, 재계약과 연봉협상을 했다.

매년 그리 드라마틱하지만은 않은, 매년 계약을 이어가고, 새로운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계약직의 연구하는 교직원의 삶이란.


이 역시도 언젠가 끝은 있을 테다.

계약이 끝나든,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에 도전하여 자리를 옮기든 말이다.


독일에서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어쩌다 오게 된 대학교에서의 삶.

같이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상사로부터, 안 좋은 평가 듣지 않고, 어떤 날이 되면 - 이를테면 생일이라던가 - 진심 어린 축하와 선물을 건네주시는 것을 보니,

그래도 영 못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마음에 안도와 더불어 힘을 내는 그런 나날의 어느 지점에 서 있다.

(어지간한 내 나이대의 문과 졸업생과 비교해서 나쁘지 않은 근무여건과 급여 수준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 역시도 그렇다.

어찌 보면 ‘전임’이 되기 전까지 ‘비전임’의 삶이 이어지는 대학원을 졸업한 연구자의 삶이란 게 사실 비슷비슷하니, 계약직이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받아들여지지만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나?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내 머릿속의 생각을 어떻게 키보드를 통해 글로 뽑아내고 있는가?”


제목을 <무제>로 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아가 그 뒤에 (아직은.)이라고 붙인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나다움’에 대해 고민한다.

‘나’란 무엇인가? ‘~답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가 합쳐져 비로소 ‘나답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남들이 평가하는 나의 모습을 ‘나다움’이라고 정의하기엔, ‘나다움’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괴리감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나 스스로를 보는 모습을 ‘나다움’이라 정의할까?

어찌 보면 이게 정답인 것 같기는 하다. 다수의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보는 나의 모습’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대략 두 가지의 생각이 가지를 치고 뻗어져 나온다.

<객관> 그리고 <주관>


‘나다움’이란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주관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가?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자니, 또 하나의 생각이 두 가지가지 사이, 또 하나의 가지를 비틀대며 뻗어댄다.


“‘나다움’을 굳이 만드려 애쓴다는 그 자체가 어찌 보면 나 스스로를 어떠한 틀에 가두는 행위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다움’이 꼭 필요로 한 것이긴 할까?”


다음 두 가지의 개념을 생각해 본다.



1)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인간을 두고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간단히, “인간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호작용하며 공동의 무언가를 만들고 지키며 살아가는” 대략 이런 뜻일 테다.


무지성으로 써 내려가는 이 글에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끌고 나온 이유는?

‘나다움’이란 게 오롯이 ‘나’ 하나만을 투명하게 보고서 규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모습이 되었든,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 내지는 지탄받을 소지가 있는 모습들은 여기서 규정하는 ’ 나다움‘에서는 철저히 배제당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 나다움‘이란 진정한 나다움이 맞다 할 수 있는가?



2) 가면 속의 인간 ‘페르소나’

학부생 시절,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었다.

사회복지학과에서 배우는 교과과정이란, 흡사 전문자격학과들과 유사하게도 관련 분야의 법이 정하는 대로 ‘전공필수’ 과목과 ‘전공선택’ 과목의 틀에 묶여있다.


이 가운데, 전공선택과목으로 들었던 ’ 정신보건사회복지론‘ 과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이 분석심리학에서 내놓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전공을 바꾼 탓 (이라고 해 두자)에 정확한 학문적 지식은 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가. 이왕 무지성으로 쓰는 글, 글쓴이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 그 이상은 내려놓아본다.)


페르소나란 단어 그대로는 가면, 그리고 칼 융의 개념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되는데,

인간은 본인이 속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법규, 관습, 질서, 도덕, 의무와 같은 것에 맞추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습성이나 성격을 마치 가면을 쓰듯 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면은 하나가 아닌 셀 수 없이 많아서, 상황에 맞게 마치 중국의 변검술사마냥 갈아 끼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인간은 마침내 가면 속 자신의 진짜 모습은 모르게 된 채 살아간다. 이렇게 배운 기억이 난다.


대략 이 두 가지 개념과 다시 ‘나다움’을 생각해 보자.

말로는 단순한 ‘나다움’이라는 세 글자가 어느새 복잡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20대 초의 정책을 하고 싶어 했던 어린 사회복지학도가 있었다.

20대 중반이 된 그 학도는 대학원생이 되어 공부를 하러 독일로 향했고,

20대 후반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청년은,

30대의 초입에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언제가 되어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민들을 안고서,

한 주의 끝, 금요일이 저물어간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전의 글들과는 달리, 최대한 긴장을 풀고, 힘을 빼고서 그저 머리에서 드는 생각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글에 담아보았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글을 쓰고 보니,

글로 뽑아내 본 저의 고민이란, 제가 숨 쉬고 있는 한 끝이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그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든 최소한 멈추거나 후퇴하지만은 않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감사하게도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도 감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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