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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와 '포르테' 사이에서

배움과 내면, 그 간극에 대하여.

큰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 있다. 아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부모들이다. 가끔 저녁도 먹고 술도 한잔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즐겁고 놀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그네들과 만남이 좋았다. 물론 늘 좋았던 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예를 들면 “요즘에 나온 차 중에는 벤츠가 제일 좋은 것 같아” “어렸을 때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게 좋아” “나중에 아이들한테 건물이라도 하나 물려주려면 지금 열심히 해야지” 같은 이야기는 동의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건 고사하고, “삶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라고 분위기 깨는 이야기가 목청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삶을 산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언제나 자신은 묘한 이질감이 주는 어색함을 견뎌야 하고, 타인에게는 묘한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준으로 삶을 살려고 했기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면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언제나 나 자신은 그 이질감 혹은 어색함을 견뎌야 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기묘한 불편함을 주곤 했다. 큰 아이 친구의 가족들을 만났을 때도 분명 그랬던 것 같다.


  그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어느 날, 친구 아이의 아빠(나는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가 주말에 홍천으로 함께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했다. ‘숙소는 아는 곳이 있다며 부담 없이 다녀오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답답한 도시를 떠나 아이에게 자연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반, 아이들끼리 잘 노는 동안 술 한 잔 하자는 마음 반으로 흔쾌히 승낙했다.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리조트였다. 숙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조금 의미했다. 일반 리조트라고 하기에는 가구도 많았고, 개인적인 짐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리조트가 아니라 일반 가정집처럼 느껴졌다.



  저녁에 술을 한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되었다. 그 리조트는 형님 가족만 사용하는 일종의 별장이라는 걸. 그 별장을 관리하는 데만 매년 2천 만 원이 넘게 들어간다는 걸. 그리고 형님의 차가 ‘포르쉐’라는 것도. 형님 집안이 부유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한 것도 더 부유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안, 부부 내외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남편은 기분파라 기분 좋을 때, 백화점 가자고 해야 돼. 그래야 사고 싶은 거 다 살 수 있거든.” “얼마 전에 타던 차는 일 잘하는 직원이 있어서 그냥 줘버려서 이번에 차 새로 산거야”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갈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은 이질감과 불편함 심지어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이질감,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 부자의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에서 오는 불편함, ‘아내와 아이들이 부자의 삶을 원한다면, 어쩌지?’라는 죄책감. 그 형님은 결코 내 앞에서 자신의 부를 노골적으로 자랑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묘한 박탈감을 느낄까 배려하는 편에 가까웠다. 차라리 형님이 내가 상상하는 부자들처럼 천박하고 노골적이었다면, 나는 위축되고 주눅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젠장! 그 형님은 부자인데다 배려 넘치고 이해심까지 많았다. 그러니 나는 더 위축이 되고, 더 주눅들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 형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더 줄어들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는 부유함 앞에 나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이 위축감으로 찾아왔을 때, 그러니까 주눅이 들었을 때, 나는 낮 뜨거운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잠이 들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한참 나눌 때였다.



  파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형님에게 “노동자의 마지막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지성인으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자동차에 많은 관심 있다고 말한 형님에게 “좋은 차, 비싼 차를 타는 것보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우선 자신의 회사와 직원들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형님에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기 것만 챙긴다면, 세상은 더 살기 힘든 곳이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날 밤 이어졌던 대화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는 모두 옳은 이야기였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날 밤 내가 했던 이야기 때문에 다음 날, 아니 지금까지도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로 창피하다. 왜 그랬던 걸까? 그 이야기가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는 모두 ‘나도 당신에게 꿀리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걸 증명하고자 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2012년 식 ‘포르테’를 탄다. 형님은 내가 몇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까 말까한 ‘포르쉐’를 탄다. ‘쉐’와 ‘테’ 한 글자 차이인데 자본주의적 시선에서 그 간극은 엄청난 것이다. 나는 ‘포르쉐’와 ‘포르테’ 사이의 간극을 내 나름으로 메워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자격지심으로 “당신은 별장이 있지만, 나는 수준 높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야!” “당신은 사장이지만 나는 훌륭한 글을 쓰는 작가야!” “당신은 포르쉐가 있지만, 나는 고결한 시대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당신은 돈이 있지만, 나는 훌륭한 삶을 사진 사람이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다. 상대는 전혀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릴 생각도 없는데, 혼자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발끈하는 상처 받은 아이처럼, 나 역시 그렇게 발끈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게다. 그러니 어찌 그날 밤 일이 창피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자본주의와 삶, 그리고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자를 부러워하는 가보다. 아니 정확히 나는 여전히 불특정 다수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어린 아이인가보다. 내가 부자를 부러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건, 물질적 풍요가 주는 편리함 때문이 아니다. 별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세상 사람들을 시선, 포르쉐를 타고 지나갈 때 훔쳐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다. 돈이 무엇이면 다 되는 시절이기에, 부자가 되면 누구에게라도 관심, 인정, 칭찬,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아니 형님을 아니 부자를 부러워하는 게다. 세상 사람들의 농담처럼, 부러우면 지는 것이니 나는 졌다. 부자를 이미 부러워해버렸으니 말이다. ‘맑스’가 어쩌니, ‘보드리야르’가 어쩌니, ‘들뢰즈’가 어떠니 잘난 척 떠들어 봐야, 지금 나는 여기다.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인정해야만 한다. 누구나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 다시 걸어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더 나아가고 싶다. 내가 배운 철학과 지식이 내 삶에 완전히 배어들기를 바란다. 어떤 자격지심도, 어떤 정서적 분열도 없는, 배움과 내면이 괴리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옳다고 믿는 이야기들을 자격지심에 욱 해서 떠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으로 터져 나와 옳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다음에 그 형님을 만나 술 한 잔을 하게 되면, 저번 홍천에서의 낮 뜨거운 모습보다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더 늦기 전에 ‘포르쉐’와 ‘포르테’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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