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평소에 입지 않던 옷을 꺼내 입고 이태원으로 갔다. ‘로스코’를 만나는 날이니까. 강렬한 색으로 인간 심연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 보다.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후문을 종종 전해 들었으니까. 그다지 섬세하지 못한 예술적 감수성 때문에 눈물까지는 아니었지만, 나의 감정 역시 그의 그림 앞에서 일렁였으니까 말이다.
‘로스코’를 만나고 광화문으로 갔다. '철학'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사람들에게 철학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주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로스코'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수업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쾌락'과 '예술'과 '철학’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1.
‘쾌락’과 ‘예술’은 무엇이 다른가? ‘쾌락’은 저급하며, ‘예술’은 고결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스타그램(이미지)’과 ‘로스코’가 다른 것처럼, 대중가요와 클래식, ‘헐리웃’과 ‘고다르’는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저급’과 ‘고결’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을 다루는 방법의 차이다. 왜 ‘인스타그램(대중가요·헐리웃)’을 하는가? 고통스러운 삶을 잊어보려는 것이다. 왜 ‘로스코’의 그림을 보는가? 삶의 고통을 승화하려는 것이다.
‘저급’은 고통의 회피이고, ‘고결’은 고통의 승화다. 이것이 '인스타그램'을 하고 난 후에는 마음이 공허하지만,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난 이후에는 마음이 고요(경건)해지는 이유다. 고통을 회피하려고 할 때 공허해지고, 고통을 승화하려고 할 때 고요해지는 것은 삶의 법칙이니까. 그렇다면, ‘저급’과 ‘고결’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쾌락’도 ‘예술’도 모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세계를 다루는 방식일 뿐이다.
‘고통을 회피하느냐? 고통을 승화하느냐?’ 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회피하든, 승화하든,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근본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과 ‘예술’ 모두 고통에서 시작에서 다시 고통으로 돌아오는 원인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쾌락’은 작은 원을 그리는 것이고, ‘예술’은 조금 더 큰 원을 그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차이는 한 인간의 삶 안에서는 결정적인 차이일 수 있다.)
‘쾌락’이 중독이듯, ‘예술’ 역시 중독적인 측면이 있다. 고통스러운 이들만이 '예술'을 하는 이유는 '예술'로서만 고통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로서 그 고통은 끝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예술'로 고통을 승화시키려는 과정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술에 중독되는 과정처럼. '로스코'가 자신의 삶을 비극적인 방식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기어이 찾아낸 희망이 사실은 다시 고통으로 돌아가는 절망임을 깨달은 이들이다.
2.
그렇다면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은 인간으로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철학자는 저마다의 강밀한 사유로, 고통이 무한히 반복되는 닫힌 원에서 탈주선을 그려내려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쾌락’과 ‘예술’보다 더 나은 일인가? '쾌락'과 '예술'이 고통의 도돌표이라면, '철학'은 고통의 마침표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리인지 나의 '철학'이 제법 얼개를 갖추고 났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철학’은 ‘쾌락’과 ‘예술’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다. 유사 이래 어떤 ‘철학’도 고통이 반복되는 닫힌 원에서 벗어날 탈주선을 마련하지 못했다. . 만약 ‘철학’이 그 탈주선을 마련했다면, ‘쾌락’과 ‘예술’은 이미 사라졌을 테지. 고통 없는 세계에서는 ‘쾌락’도 ‘예술’도 존재의 이유가 없으니까. '철학'은 고통의 마침표를 지향했을 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철학자는 지혜롭기보다 한없이 어리석은 이들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 때문에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끝내려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헛웃음이 났다. 내가 왜 '철학'에 끌렸는지, 내가 왜 지금껏 '철학'을 하고 있는지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안 될 걸 알면서도 해왔던 인생이다. 나는 기질적으로 안 될 것 같아도, 안 될 것을 알아도 하고 싶으면 해야 하는 인간이다. 그런 내게 ‘철학’은 참 잘 맞는 일이었구나. ‘로스코’를 보고 광화문으로 오는 길에 깨달았다. “나는 ‘철학’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쾌락’은 이미 지나왔고, ‘예술’은 기질적으로 맞지 않으니까.
나는 그저 생겨 먹은 대로 살아야겠다. 작은 원이든, 큰 원이든, 닫힌 원 안에서 반복하며 사느니,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작은 차이(탈주)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며 살고 싶다.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안다. 나와는 비교도 안될, 수 없이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조차 이르지 못한 곳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너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세계에 작은 탈주선 하나를 그려내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게 더 잘 어울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