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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던 '전투모드'

'이질적인 것'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들과 여행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KTX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탔다. 어린 아들이 안쓰러워보였는지 한 분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나는 아이 앞에 섰고, 아이 옆에는 앳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들이 앉자마자 그 남자는 핸드폰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아들에게 불쑥 사탕 하나를 건넸다. 그 남자는 아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 앳되어 보이는 여자에게 “아이가 너무 귀엽지 않아요?”라고 물었고, 여자는 “네”라고 짧게 답했다.


 처음에는 앳된 여자 아이와 그 남자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아들과 내가 지하철에 타기 전부터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꾸만 말을 걸었지만, 여자는 왠지 불편하고 어색해하고 있었다. 급기야 남자는 게임을 끄고 여자에게 전화기를 들이대며, “전화번호 알려줘요”라고 말했다. 여자는 “저.. 남자 친구 있어요”라고 말했다. 당황했기 때문이었는지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는지 여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저도 애인 많아요. 그러니까 번호 찍어 줘요”라고 채근했다.


 그때 그 남자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힘든 일을 하는지 손은 어부처럼 거칠었고, 초저녁이었지만 술에 취해서 있었고, 부담스러울 정도 크기의 금반지를 손가락마다 하나씩 끼고 있었다. 정신적 질환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짐작키에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과 공감하고 배려하면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사회성이 조금 결여된 사람 같아보였다. 연락처를 채근하는 그 남자에게 “그만 하시죠”라는 짧은 말과 함께 여자 아이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나와 아들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으로 게임을 했다.


 아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가 어떤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내게 예측 불가능한 ‘이질적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착역이 되어 내리려고 준비를 할 때, 그 남자 역시 황급히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들과 내 옆으로 붙어서 말이다. 막연한 불안은 구체적인 두려움이 되었다. 아들을 내 뒤로 보내고 나는 소위 말하는 ‘전투모드’에 돌입했다. 남자가 돌발행동을 할 때 바로 제압할 수 있도록 ‘일상모드’에서 ‘전투모드’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 남자는 우리를 몇 번 쳐다보기는 했지만 역에서 내려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전투모드를 쉽사리 해제하지 못했다. 새끼를 지켜야한다는 애비로서의 본능 때문이었다. 전투모드일 때 나는 그리 생각했다. “애한테 손만 대봐. 그 순간 죽여 버릴 테니까” 전투모드는 야만성이다. 집으로 다와 갈 때쯤은 전투모드는 해제되었고, 나는 부끄러워졌다. 철학을 공부하는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질적인 것 앞에서 야만적인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한다!” 성숙한 인간을 꿈꾼다면, 인간다운 공동체를 꿈꾼다면, 이질적인 것 앞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인간다움을 유지해야 한다.


 유사 이래 인간의 역사를 보라. 인간은 언제나 ‘이질적 것’을 야만적으로 제거하려고 했다. 나와 다른 존재는 언제나 제거의 대상이었다. 세상의 모든 폭력은 언제나 ‘이질적인 것’들을 제거하려는 욕망의 발현이었다. 이해도 된다. ‘이질적인 것’은 불확실한 것이기에 두렵다. 그래서 ‘이질적인 것’과 대화하고 사랑하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야만과 폭력으로 제거하려하는 것이다. 내가 그 남자에게 폭력을 준비했던 것처럼.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 막상 삶에서는 잘 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었지만,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에게 천진하게 사탕을 건넬 만큼.


 하지만 나는 ‘이질적인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 것(아들)을 지키고 싶다는 그 이기심, 내 것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래서 전투모드를 해체할 때쯤 부끄러웠던 것일 테다. 결국 나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정당화했던 그 수많은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다운 공동체를 꿈꾼다. 그런 공동체가 어려운 이유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 앞에서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통제하기 쉽지 않기 때문일 테다.


 어제보다 성숙한 사람을 꿈꾸는 나는, 사람 냄새나는 공동체를 꿈꾸는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질적인 것’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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