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 이는 스코투스의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중세 철학의 주된 화두는 ‘이성’과 ‘신앙’의 중재와 조화였다. 즉, ‘신앙’(신)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중세 철학 일반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스코투스는 중세 철학 즉, 이성과 신앙을 연결하려던 일련의 시도들을 정교하게 베어버린다. 안셀무스의 “알기 위해(이성) 믿어야(신앙) 한다”는 말도, 아퀴나스의 “믿기 위해서는(신앙) 알아야 한다(이성)”는 말도 모두 베어버린다.
스코투스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는 중세 철학 일련의 노력들을 모조리 끊어 버린다. 이는 스코투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신학(신앙)은 철학(이성)보다 더 심오하고 넓은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스코투스에게 ‘신앙’을 ‘이성’으로 논증하려는 모든 시도는 작은 그릇(이성)에 큰 그릇(신앙)을 포개려는 어리석은 시도처럼 보였다. 그의 이런 철학은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들뢰즈는 이 ‘존재의 일의성’을 이렇게 말한다.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가 목소리라는 것, 그리고 존재가 말해진다는 것, 모든 대상의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의 논리』 질 들뢰즈
‘존재의 일의성’은 무엇일까? ‘존재’는 ‘있음’이고, ‘일의성’은 ‘유일한 하나’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존재의 일의성’은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유일하다’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가 목소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가진 독특한 목소리처럼, 혹은 발화될 때마다 유일하게 드러나는 목소리처럼 하나뿐인 유일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목소리처럼 모두 유일하다면 ‘신’과 ‘나’ 역시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것 아닌가? ‘신’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스코투스는 신의 초월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존재의 일의성’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 철학에서 기묘한 의미를 지닌다. 스코투스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념으로 ‘신’의 초월성을 더욱 강화한다.
인간‧새‧나무‧꽃 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저마다 다 유일하다면 그 모든 존재들을 관통하는 본질 같은 것은 없는 것 아닌가? 중세의 철학은 바로 이런 본질을 찾는 과정이었다. 중세 철학 일반은 ‘신-본질-존재자’의 도식으로 구성된다. 즉, 신이 본질(이데아)을 만들고, 그 본질에 따라 인간‧새‧나무‧꽃 같은 존재자들이 존재하게 된다는 도식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신(신앙)은 얼마든지 이성(철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다. 철학(이성)으로 신이 만든 본질을 찾으면 신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코투스는 모든 존재자들을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스코투스의 도식은 ‘신-존재자’이다. 즉, 신과 존재자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신은 본질에 따라 존재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이라는 본질을 만들고, 그에 따라 ‘진규’, ‘선빈’, ‘유미’, ‘영순’, ‘동환’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신은 저마다 하나의 유일한 존재를 직접적으로 만든다. 신은 어떤 본질로도 환원되지 않는 일의적인(유일한) 존재인 ‘진규’ ‘선빈’ ‘유미’ ‘영순’ ‘동환’을 직접적으로 만든다. 그러니 아무리 ‘이성’적인 인간이라도 신의 뜻을 파악할 수 없다.
스코투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가 ‘형상’과 ‘질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빨간 장미가 하나 피었다면 이는 신이 만든 필연적 (빨간 장미의) ‘형상’에 ‘따라’, 질료(흙, 물 등등)가 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미꽃은 민들레나 새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필연적으로 빨간 장미꽃이 될 수밖에 없다. 신이 그렇게 ‘형상’을 정했고 그에 따라 ‘질료’가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투스의 관점은 다르다.
스코투스는 신이 ‘우연성’에 따라 세계를 만들었다고 본다. 즉 그 꽃이 빨간 장미인 이유는 우연이다. 쉽게 말해 스코투스에 따르면, 신은 전능하기에 ‘형상’과 ‘질료’라는 필연적 법칙마저 초월해 있다. 신은 우연히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세계도 만들 수 있었던 셈이다. 스코투스의 ‘존재의 일의성’은 ‘철학’(형이상학)의 한계를 의미했고, 동시에 그 한계는 ‘신학’의 폭과 깊이를 더욱 크게 해주었다. 쉽게 말해, ‘형상‧질료’를 논하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신’을 논하는 ‘신학’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런 스코투스의 관점은 근대의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이어진 현대의 ‘가능 세계론’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가능 세계론’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존재할 수 있었던 다양한 세계들 중 하나’라는 이론이다. ‘철학’의 한계를 선언하고, ‘신학’으로 선회하려했던 예리한 박사의 시도는 다시 현대철학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어찌 보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되는 ‘헥시어티’라면 고정된 하나의 필연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얼마든지 변덕스럽게 존재할 수 있었던 세계들 중 하나의 세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