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안이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럽혀졌을까?
한때 정리정돈 전문가라는 직업이 있었다.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정돈해 주거나 그런 기술을 알려주는 직업이다. 이는 생각해 보면 참 기이한 직업이다. 집 안 정리에 딱히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런 일 정도는 스스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을 대신 해주거나 혹은 그런 기술을 알려주는 직업이 생긴 것은 생경하고 기이한 일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그 기인한 직업이 생긴 이유가 있을 테다.
정리정돈 전문가라는 직업은 왜 생겼을까? 일차적으로 스스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어지럽혀진 집안이 많아졌기 때문일 테다. 그렇다면 그런 집들은 왜 많아진 것일까? 단순히 청소나 정리정돈을 소홀히 하는 집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불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사다 모으고, 불필요한 것들을 적절할 때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지러운 집안은 정리정돈이나 청소의 문제가 아니라, ‘미니멀리즘’의 문제다.
미니멀리즘 부재의 시대
미니멀리즘이 무엇일까?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문화적인 흐름이다. 이는 더 적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최소한의 필요한 물품만으로 집안을 꾸리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정리정돈 전문가가 등장한 이유는 우리 시대에 이 미니멀리즘적인 자세가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주거 공간의 문제라 볼 수 없다.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집안은 지금 우리네 삶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왜 집안이 스스로 정리정돈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었을까? 삶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은 정말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하지 않은가? 지금 하고 있는 업무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일이 쏟아진다. 그뿐인가?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고 있는 영어 공부, 항상 신경 써야 하는 주식 투자, 챙겨야 할 경조사들 등등.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말은 결코 과장법이 아니다.
우리는 과부하가 걸린 삶을 산다.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미니멀리즘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에게 미니멀리즘은 아름답지만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발 디딜 틈 없이 엉망이 된 방은 과부하가 걸린 복잡한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정돈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다.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단순하게 살 수 있을까?
보편논쟁
서양 중세 철학의 시작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면, 그 마지막은 윌리엄 오컴이라고 할 수 있다. 오컴은 ‘이성’(철학)으로 ‘신앙’(종교)을 설명하려 했던 선배 철학자들의 사유들을 ‘낡은 길via antiqua’로 여기면서 ‘새로운 길via moderna’을 가려고 했다. 오컴은 자신의 ‘새로운 길’을 따라 중세철학을 매듭짓고 근대 철학의 문을 연다. 오컴을 통해 우리의 질문에 답해보자.
어떻게 단순하게 살 수 있을까? 오컴의 철학을 빌려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어 버려라!”‘오컴의 면도날’은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의 ‘보편논쟁’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보편논쟁은 ‘실재론’과 ‘유명론’의 사이의 논쟁이다. 이 논쟁의 쟁점은 ‘개별자-보편자’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연필‧지우개‧볼펜‧필통이 있다고 해보자. 이것들은 모두 물질적인 ‘개별자’다. 그리고 이 모든 개별자를 아우르는 ‘필기구’라는 개념이 있다. 이 관념적인 개념이 바로 ‘보편자’다. ‘실재론’은 ‘보편자(필기구)’가 ‘개별자(연필‧지우개‧볼펜‧필통)’에 앞서서ante res 온다는 관점이다. 즉, ‘실재론’은 ‘보편’적인 개념(필기구)이 먼저 있기 때문에 ‘개별자(연필‧지우개‧볼펜‧필통)’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오컴의 ‘유명론唯名論’
반면 ‘유명론’은 ‘보편자(필기구)’는 ‘개별자(연필‧지우개‧볼펜‧필통)’ 뒤에post res 온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유명론’은 ‘개별’적인 ‘연필‧지우개‧볼펜‧필통’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개념(필기구)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쉽게 말해, ‘실재론’은 관념(보편자) 중심의 이론이고, ‘유명론’은 물질(개별자) 중심의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편논쟁은 이런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의 논쟁이었고, 오컴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명론’의 관점을 견지했다.
보편자는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 추상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 『명제집 주해』 오컴
오컴에 따르면, 보편자는 단지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꽃’, ‘필기구’, ‘인간’과 같이 어떤 공통적인 형식이나 본질 같은 관념(보편자)은, ‘장미‧민들레‧백합…’ ‘연필‧지우개‧볼펜‧필통…’ ‘민혜‧문주‧진규‧수철…’ 같은 개별자들을 보고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다. 오컴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개별자들뿐이며,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오컴에 따르면, 모든 보편자(꽃)들은 다수들의 개별자(장미‧민들레‧백합…)들을 통한 추상적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일종의 허구일 뿐이다.
‘유명론唯名論’은 관념적인 보편자(인간다움‧아름다움…)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단지唯 이름名일 뿐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신학자였던 오컴이 최고의 보편자인 ‘신’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느 중세 철학자들은 ‘실재론’자에 가까웠다. 그들은 신이 보편자인 ‘형상’(인간다움)을 만들고 그 형상에 따라 개별자인 ‘인간’을 만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보편자’(신‧형상)가 ‘개별자’(인간)보다 앞서서 온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컴은 ‘유명론’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며 신의 역능을 강화하려 했다. 바로 여기에 오컴의 기발함이 있다.
신이 직접 인간을 만든다.
신은 자신의 제2 원인을 수단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그것들 없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 … 시공간적으로 다른 독자적인 대상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대상은 오직 신적인 전능을 통해서만 현존한다. 『일곱 가지 자유토론』 오컴
오컴이 말한 “제2 원인”은 관념적인 보편자(형상)다. 오컴에 따르면, 신은 그 제 2원인 없이도 직접적으로 개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독교에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이 오컴의 유명론을 잘 드러낸다. 오컴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들은 ‘아버지’(신)가 ‘직접’ 창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관념적인 보편자(인간다움)는 신이 개별자(민혜‧문주‧진규‧수철…)들을 창조하는 데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버지’가 어떤 설계도를 보고 ‘나’를 낳은 것이 아니듯, ‘하느님 아버지’ 역시 보편자(인간다움)를 통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컴의 입장이다. “독자적인 대상”들 예컨대, 들판에 핀 꽃도, 바다의 파도도, 하늘 위의 구름도, 뛰노는 개도,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오직 신의 전능에 의해서만 현존할(지금 있을) 수 있다.
중세 ‘실재론’자들의 도식이 ‘신⟶형상⟶인간’이라면, 오컴의 도식은 ‘신⟶인간’인 셈이다. 오컴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과 개별자(민혜‧문주‧진규‧수철…)들뿐이다. 오컴에게 ‘인간다움’이라는 보편자(개념)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래서 신은 보편자(관념·형상)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은 전능하기에 보편자 너머에 있다. 이렇게 오컴은 ‘유명론’으로 신의 전능을 더욱 강화한다.
오컴의 면도날
중세의 철학자들이 ‘실재론’을 따를 때 오컴은 어떻게 ‘유명론’을 견지할 수 있었을까? 바로 ‘오컴의 면도날’ 때문이다. 오컴은 자신만의 면도날, 즉 ‘오컴의 면도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명론을 견지할 수 있었다. ‘오컴의 면도날’은 무엇일까? 이는 “다수는 필요하지 않다면 결코 가정해서는 안 된다.Numquam ponenda est pluralitas sine necessitate”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에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러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컴은 정작 그의 저작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오컴의 면도날’이란 격률로 유명하다. 격률에 따르면, “존재들은 필요 없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오컴은 이 격률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효과를 내는 말을 했다. “더 작은 수로 할 수 있는 일을 더 큰 수로 하는 짓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 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성(최소 가정)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이다. 이는 삶의 진실이 ‘단순성Parsimony’에 있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해,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이 있다면 단순한 것이 삶의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어떤 질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주술사는 그 원인을 악귀 때문이라고 하고, 의사는 벌레 때문이라고 했다.
둘 중 누가 삶의 진실에 가까울까? 오컴이라면 의사라고 말할 테다. 하지만 이는 의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한 결론이 아니다. 순수하게 ‘오컴의 면도날’에 근거한 결론이다, “다수는 필요하지 않다면 결코 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의사의 진단이 참이다. 주술사는 질병의 원인을 악귀라고 가정했고, 의사는 벌레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사의 결론에는 더 이상의 가정이 필요 없다. 벌레는 지금 내 눈앞에 있으니까. 하지만 주술사는 다르다. 주술사는 질병의 원인을 악귀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악귀는 지금 내 눈앞에 없기에 악귀가 무엇인지에 관해 또 한 번의 가정이 필요하다.
즉 주술사는 자신의 결론에 이르기 위해 두 번 이상의 가정을 해야 하고, 의사는 단 한 번의 가정이면 충분하다. 바로 이 때문에 질병의 원인이 악귀가 아니라 벌레라는 주장이 삶의 진실이 된다. 두 번(다수)의 가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명제보다 한 번의 가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명제가 삶의 진실에 가깝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즉, ‘오컴의 면도날’은 불필요한 다수의 가정으로 설명하는 명제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면도날인 셈이다.
미니멀리즘을 위해 필요한 칼, ‘오컴의 면도날’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단순하게 살 수 있는가? ‘오컴의 면도날’이 있다면 가능하다. 미니멀리즘, 즉 최소한 것을 가지려는 태도는 왜 실현하기 어려운가?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오컴의 면도날’이 필요한 이유다. ‘오컴의 면도날’을 통해 필요한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을 구분해 내어 미니멀리즘에 도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정리정돈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엉망이 되어버린 집안을 어떻게 단순하게 만들 것인가? 간명하다. 필요한 것들만 사고, 불필요한 것들은 사지 않으면 된다. 또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들은 버리면 된다. 이때 필요한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구분할 것이냐?
오컴의 ‘면도날’로 그 경계를 그을 수 있다. 집안의 옷들을 정리한다고 해보자. 이때 옷들을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관념(실재론)’적인 옷과 ‘경험(유명론)’적인 옷. 관념적인 옷운 무엇인가? 이는 “저 옷을 입으면 관심받고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옷이다. 반대로 경험적인 옷은 어떤 것인가? 이는 “저 옷을 입으면 편안하고 시원(따뜻)할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옷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어느 옷을 베어버리려고 할까? 관념적인 옷이다. 왜냐하면 이 옷은 ‘관심‧인정’이 무엇인지 다시 가정해야 하는 옷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적인 옷은 다수의 가정이 필요 없다. ‘편안함‧시원(따뜻)함’은 직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심받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옷은 사지 말아야 할 옷이고 버려야 할 옷이다. 반면 편안하고 시원(따뜻)한 옷은 사야 할 옷이고 남겨야 할 옷이다.
집안은 왜 복잡해졌는가? 관념적인 것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옷을 사면 관심받을 수 있을 거야. 저 옷도 사면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나둘 사 모은 물건들이 쌓이고 쌓여서 집안이 복잡해진 것 아닌가. 다수의 가정이 필요한 관념적인 것들 때문에 집안이 복잡해진 것이다. 그러니 집 안을 정리하려면 정리정돈 전문가를 부를 것이 아니라, 단호함이 필요하다. ‘관념적인 옷’을 버리고 ‘경험적인 옷’을 남기는 단호함. 편안함‧시원(따뜻)함에는 경험이 있을 뿐, 관념이 없다. 그래서 경험적인 옷만을 남기면 집안도 단순해진다.
신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만 남겨라.
삶을 단순하게 사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오컴의 면도날’로 관념적인 것들을 베어버리면 된다. 관념적인 것들을 베어 버려서 신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만 남겨 나갈 때 삶은 조금씩 더 단순해진다. 단순한 삶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명쾌하게 구분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 구분의 기준은 ‘신체’다. 단순한 삶은 머릿속에만 있는 관념을 버리고 오감으로 경험되는 신체를 중요시할 때 이를 수 있다. 오컴이 중세를 마감한 자리에 등장한 탁월했던 근대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정신의 대상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이며, 그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누구든지 먼저 우리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신체) 이 합일을 충분하게 또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에티카』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신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철학자였다. 그는 신체와 정신은 평행하며 동시적이지만 신체가 더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신체의 합일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이다.
스피노자는 “우리 정신의 대상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의 정신이 옷이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직접 경험한 옷이라는 의미다. 이는 신체가 직접적으로 경험(편안함‧시원함‧따뜻함)한 옷이 진정한 옷이며, 정신 속에만 있는 관념(인정‧관심)적인 옷은 허구의 옷이란 말인 셈이다.
복잡한 삶에서 단순한 삶에 이르는 비결은 어렵지 않다. 관념적인 것들을 버리고 신체적인 것들을 남기면 된다. 정신(관념)적인 것을 베어내고 신체(경험)적인 것만을 남기면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가 남는다. 우리는 단순한 삶의 기쁨을 바라는 만큼, 동시에 허영이 주는 기쁨 역시 내려놓을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미니멀리즘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단순한 삶의 여유냐? 복잡한 삶의 허영이냐?
‘단순한 삶의 여유냐? 복잡한 삶의 허영이냐?’ 이것이 미니멀리즘의 성패를 가르는, 아니 우리 시대 행복의 성패를 가르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세련된 옷을 입으면 관심받을 수 있을 거야” “저 책을 읽으면 지적인 사람처럼 보일 거야” “대기업에 다니면 근사한 사람처럼 보일 거야.” 우리의 무의식 아주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이러한 관념은 모두 허영이다. 이 훈육된 허영을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다.
‘단순한 삶의 여유를 원해!’ 복잡한 삶에 치일 때 세상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는 진심이 아니다. 단순한 삶을 원해 퇴사를 했던 이들이 다시 복잡한 직장을 돌아가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이는 직장을 통해 충족되는 갖가지 허영을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있어야 보여야지”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단순한 삶을 그토록 바라면서도 복잡한 삶에 너무나 손쉽게 휩쓸려 살아가게 되는 이유 아닌가.
‘있어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있어 보이는 것’은 관념이고, 있는 ‘있는 것’은 신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신체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한 삶을 원하는가? ‘있어 보이는 것’을 베어버리고, ‘있는 것’에 마음을 쏟으면 된다. 오감으로 경험되는 신체에 집중할 것! 나머지는 모두 베어버릴 것! 이것이 미니멀리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삶은 원래 단순하다. 다만 단순해지는 것이 복잡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