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철학의 간절한 바람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안셀무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중세 철학자들이 바랐던 것이 있다. ‘이성(철학)’과 ‘신앙(종교)’의 조화였다. 정확히는 ‘신앙’(신‧종교)을 ‘이성’(철학‧논리)으로 명확하게 이해시키려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오컴은 선배 철학자들의 이런 노력들을 ‘낡은 길via antiqua’로 규정하며 ‘새로운 길via moderna’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 ‘새로운 길’은 무엇일까? ‘이성’과 ‘신앙’의 조화는 불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도 ‘이성’(철학‧논리)으로 ‘신앙’(신‧종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천명하는 길이었다. 오컴의 ‘새로운 길’은 ‘이성’과 ‘신앙’이 공존하던 중세 철학에서 ‘이성’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신앙’만을 남기려는 길이었던 셈이다. 신앙이 힘을 잃은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전혀 ‘모던’하지 않은 길이 오컴에게는 ‘모던한moderna 길’이었던 셈이다.
오컴은 어떻게 그리 과감하게 ‘이성’을 잘라낼 수 있었을까? 선배 철학자들의 공로 덕분이다. 유럽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될 무렵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상징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그리스철학에 익숙한 시대였다. 그러니 처음 유럽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초기 중세철학자들은 이성적인 그리스 철학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기독교 자체가 유럽인들에게 충분히 익숙해질 무렵에 오컴이 등장한 것이다. 오컴에 이르러 더 이상 이성적인 그리스 철학을 통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오컴이 과감하게 ‘이성’을 잘라내고 오직 ‘신앙’만을 논하는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유럽의 기독교 역사를 보며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한국의 기독교는 굉장히 자본주의적이다. 신에게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교회가 돈을 벌 수 있는 효과적인 커뮤니티로 기능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 전도를 위해 “주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문구가 인쇄된 지폐를 나눠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을 비판적으로만 볼일인가?
우리는 자본주의에 익숙한 시대에 산다. 그러니 하나의 방편으로서 자본주의를 통해 기독교를 전도할 수 있다. 초기 중세 신학자들이 그리스 철학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신이 없는 세상보다, 신이 있는 세상이 조금 더 인간다운 세상이라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신을 믿음으로써 조금 더 인간다운 사회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리스 철학이든, 자본주의든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주사를 맞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사탕이라도 주어 주사를 맞게 하려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못할바 없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방편은 방편일 뿐이다. 방편이 효과를 다하면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오컴의 진정성이 있다. 오컴은 ‘이성’적인 그리스철학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기에 때가 되어 ‘신앙의 본령’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것이 오컴이 당대 권력으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철저히 거부하며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서서 기득권을 비판했다. 이는 오컴이 생각한 ‘신앙의 본령’이 ‘하느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을 테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종다양한 세계인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식이기에 기독교는 국가와 문화를 넘어 세계가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니까 말이다.
신앙(기독교)의 본령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식이라는데 있다. 그러니 누군가 더 많은 재산을 가지는 것은 신앙의 본령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가장 약한 자식에게 더 큰 사랑을 보내주듯 ‘하느님 아버지’ 역시 사회적 약자를 더 큰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하느님의 아버지’의 자식으로 우리는 모두 동등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성’을 제거하고 ‘신앙의 본령’을 바로 세우려는 오컴의 진정성은 당대 기득권에게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한국의 기독교에는 ‘오컴’이 있는가? 현재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어떤가?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자본주의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류 교인들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네들에게 오컴의 진정성이 있을까? ‘방편’(자본주의)을 과감하게 베어내고 ‘신앙의 본령’(하느님 아버지!)을 바로 세울 진정성이 있을까?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방편을 버리고 모두가 동등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신앙의 본령’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어쩌면 오히려 대다수 교인들에게 신이 방편이고, 자본주의가 본령인 것은 아닐까? 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컴의 ‘면도날’이 필요하다면, 신을 믿는 이들에게는 오컴의 ‘진정성’이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