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인간의 숙명이다.
‘저 사람은 딱 봐도 싸이코네!’ ‘직장 그만두면 못 먹고 살아!’ ‘여자(남자)는 원래 다 그래’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이는 모두 편견이다. 편견은 불완전한 의식(생각‧판단‧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이들의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종류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편견이 있다. 말하자면, 편견은 인간의 숙명인 셈이다.
왜 그럴까? 컴퓨터가 입력된 데이터를 가지고 연산하듯, 인간 역시 지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로 사유(의식)한다.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 내리고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신념은 결국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지는 지각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의식(생각‧판단‧신념)의 기초인 이 지각은 터무니없이 불완전하다. 바로 이것이 편견이 인간의 숙명인 이유다.
어느 쪽이 선이 더 길어 보일까? 아래쪽 선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선의 길이는 같다. 이런 종류의 착시는 흔하다. 이처럼 인간의 지각 능력은 불완전하게 짝이 없다. 그러니 그 지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로 형성된 의식 또한 불완전할 것은 자명하다. 이런 숙명과도 같은 편견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편견을 극복한 만큼 행복할 수 있다.
편견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편견을 넘어서는 것이 훌륭한 삶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딱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조금 예민했을 뿐, 좋은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편견 때문에 그 사람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관계가 되곤 한다. 이는 뒤집어 말해, 그 편견을 넘어설 수 있다면 우리네 삶에 기쁨을 더 해줄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직장을 그만두면 못 먹고 산다’는 편견은 또 어떤가? 영혼을 질식시키는 직장을 떠나지 못해 펼쳐진 불행한 삶은 바로 그 편견 때문에 발생한 사달 아닌가? ‘여자(남자)는 다 그래’라는,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편견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새로운 이성을 만나 다채롭고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갈 가능성을 막는다. 후자는 돈 이외에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가치들이 피어나지 못하게 막을 수밖에 없다.
편견에 갇힌 만큼 불행하고, 편견을 극복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어떻게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의심’이다. 의심하면 된다. 내가 확실하다고, 옳다고 믿는 것들을 처음부터 모조리 의심할 수 있으면 된다. 그 의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그 선입견들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의심의 철학자, 데카르트
여기서 의심의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세상 모든 것을 의심했던 철학자, ‘데카르트’를 만나보자. 데카르트는 ‘신(믿음)’이 중심이었던 중세 철학을 저물어가는 자리에서 ‘인간(이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근대철학의 서막을 열어젖힌 철학자다. ‘어떻게 편견에서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데카르트라면 다음과 같이 답해줄 것이다. “생각(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
이는 어떤 의미인 걸까? 먼저 데카르트의 사유를 따라가 보자. ‘이성’을 중요시했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지, 결코 의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신이 아닌 인간의 시대(근대)에서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철저한 의심(사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 진리의 원천인 전능한 신이 아니라, 최고의 능력과 책략을 겸비한 교활한 악마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든다고 가정하겠다.『성찰』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최고의 능력과 책략을 겸비한 악마가 자신을 온 힘을 다해 속이려 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려 한다. 그는 자신 사고의 모든 바탕을 포기한다. 즉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들, 예를 들면 ‘2와 3을 더하면 5이다’라는 수학적 기초마저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이런 철저한 의심을 통해 가장 ‘이성’적인 학문인 철학의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
신을 중심으로 하던 중세 철학은 모두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철학이다. 그래서 중세 철학이라는 건물은 아무리 오래 또 아무리 근사하게 짓더라도 모래성일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그런 실수를 피하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고자 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흔들이지 않은 기초를 찾고자 했던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철학의 규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충분한 인식을 얻어낼 수 있는 대상만을 다루어야 한다.『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르네 데카르트
‘회의주의’의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철학은 어떤 경우에도 의심할 수 없는 대상만을 다루어야 한다. 데카르트에게 철학은 결코 틀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여,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즉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이야 했다. 그것을 찾아 그 위에 사유를 쌓아 올려야만, 근대철학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철학을 쌓아 올려야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존재할까? 세상에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 있을까?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회의주의skepticism’라는 암초를 만나게 된다. 회의주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이나 인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므로, 인간의 능력으로 보편타당한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 이는 의심할 수 없는 명제일까? 그때 회의주의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인 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회의주의자들이 보기에 내각의 합이 180도인 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지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곡면으로 구성된 지구상에 내각의 합이 180도인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너머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는 회의주의자들의 끝없는 의심을 끝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절대적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기초를 찾는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지금까지 내 정신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은 꿈에서 등장하는 환상보다 조금도 참되지 않다고 여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은 반드시 무언가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진리는 매우 확고하고 확실한 것으로서 회의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억측에 의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점에 주목하여 나는 이것을 내가 추구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발견한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코기토’(cogito)였다. ‘코기토cogito’는 ‘생각하다’라는 뜻의 라틴어인 ‘cogitare’의 1인칭 형태다. 즉 ‘코기토’는 ‘나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의심 가능하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아무리 모든 것을 끊임없이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생각)하고 있는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 의심(생각)하고 있는 자신마저 의심할 때, 의심 자체가 불가능해지니까 말이다.
데카르트는 생각하고 있는 자신만은 어떤 식으로든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라 천명했다. 바로 이것이 중세를 가름하고 근대를 연 그 유명한 철학적 개념, ‘코기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는 이 ‘코기토’를 기초로 해서 추론을 이어 나가면, 논의가 더 복잡해지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심이 판을 시대에도 왜 편견이 난무하는가?
이제 우리의 고민으로 돌아가자. 편견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생각(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였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 ‘돈만 많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이 편견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할 때 극복가능하다. ‘돈=행복’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그저 덥석 믿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할 때, 많은 돈을 가졌지만, 지독히도 불행한 이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딱 봐도 싸이코네!’ ‘직장 그만두면 못 먹고 살아!’ ‘여자(남자)는 원래 다 그래’ 이와 같은 편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제한된 지각으로 얻은 정보를 믿지 않고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사유(의심)할 때, 편견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코기토’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할 때, 우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그 편견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점이 있다. 지금은 믿음이 사라진 시대이며, 의심이 판을 치는 시대 아니던가? 그런데 편견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다양하고 더 강도 높은 편견들을 도처에서 만나곤 한다. 우리는 의심이 판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왜 편견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 걸까? 이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시 데카르트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코기토’의 숨겨진 의미
사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철학사적 맥락에서 보면 한계가 많은 개념이다. 인간 이성(정신)의 완전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본유관념’(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타고난 관념’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 또 인간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가지 실체로 이루어졌다(이원론)는 주장은 후대 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가 철학사의 묵직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데카르트가 근대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어떻게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을까? 회의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코기토’라는 하나의 철학적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코기토’에는 숨겨진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서양 중세는 신의 말씀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던 시대였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역시 신이 창조한 것이었다. 즉,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신 때문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하지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중세의 질서에 반기를 든다. 이것이 당대에 어떤 의미였을까? 불경하고 불온하게도 신을 부정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이어야 하는데, 지금 데카르트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생각 즉 ‘이성’에서 찾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생각’(이성, 정신)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성 아버지!) 신이 세상의 중심인 중세에 이보다 더 위험하고 불온한 이야기도 없었다. 실제로 당시 위트레흐트 대학의 총장이었던 ‘보에티우스’는 데카르트를 무신론을 선전하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여 치안 판사에게 고발하기도 했다.
‘의심하는 것’들과 ‘의심하지 않는 것’들
데카르트가 근대의 아버지가 된 것은 ‘의심(사유)’ 때문이 아니라 ‘의심(사유)의 태도’ 때문이었다. 데카르트가 가진 의심(사유)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을 만한 것들까지도 과감하게 의심(사유)하는 태도였다. 중세를 살았던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목숨을 건 의심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데카르트 이전에 ‘지오다르노 브루노’라는 사람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다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 많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의심하는가? “적게 가지는 것에 행복이 있어” “직장을 떠나면 새로운 삶이 보여” 이런 생각은 집요하게 의심한다. 왜 그런가? 적게 가지는 것이, 직장을 떠나는 것이. 지금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낯설게 하며,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런 의심들은 역설적이게도, 편견을 더욱 고착시킬 뿐이다.
우리는 무엇을 의심하지 않는가? “돈만 많으면 행복할 수 있어” “직장을 떠나면 불행해져” 이런 생각은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생각을 의심하지 않아 돈을 벌기 위해 기계처럼 혹은 짐승처럼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낯설게 하고 뒤흔들어서 기쁘고 유쾌한 삶으로 나아가게 해줄 생각들을 집요하게 의심하며, 반대로 불안과 슬픔에 익숙해진 삶을 정당화 해주는 생각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칸트의 ‘이성’
편견에서 벗어날 길은 분명 ‘이성(의심)’이다. 하지만 모든 ‘이성’이 편견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칸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동적 이성으로, 그러니까 이성의 타율로서의 성벽을 편견이라고 일컫는다.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
칸트에 따르면 ‘이성’에는 ‘수동적 이성’과 ‘능동적 이성’이 있다. ‘수동적 이성’이란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취하는 준칙(기준이 되는 규칙)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것이 ‘편견’이라고 말한다. 즉 ‘사유(이성)’가 작동하더라도, 그것이 타율로서 즉 타자의 이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사유라면, 그것 역시 편견이라는 것이다.
편견을 넘어 삶의 진실에 이르기 위한 ‘이성’은, ‘능동적 이성’이다. 즉 세상의 준칙을 넘어서 스스로 생각해서 얻게 되는 ‘이성’을 통해 삶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능동적 이성’은 아무런 저항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하는 단순한 사변이 아니다. 이런 이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숙함이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미숙함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의 결핍 때문이라면 미숙함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임마누엘 칸트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란 편견을 넘은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편견은 미숙함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다. 이는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결단력과 용기의 결핍”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서 능동적으로 사유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다면, 영원히 편견이라는 무능력의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진단이다.
부동산 안정화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은 왜 그런 생각하는가? ‘능동적 이성’이 작동한 결과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집값이 떨어지지 않기를, 혹은 계속 오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집값이 떨어지더라도, 진정으로 옳은 정책이 무엇인지 능동적으로 사유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다. 이것이 그들이 편견을 넘어 깨달음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이유다. 이런 미숙함은 사회 도처에 얼마나 많던가.
사유할 수 있는 용기
편견을 넘어 삶의 진실에 이르는 길은 분명하다.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익숙한 집이 사실은 불행 근원은 아니었을까?’ ‘편안한 연애는 이미 사랑이 끝난 것 아닐까?’ ‘안전한 직장이 내 영혼을 좀먹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러한 것들까지 과감하게 알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마저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데카르트가 중세를 벗어나 근대를 열어젖혔던 의심처럼, 우리 역시 익숙한 삶, 편안한 삶, 안전한 삶, 그리고 그런 삶을 정당화 해주는 모든 관념에 대해서까지 과감하게 알려고 해야 한다. ‘의심(사유)’보다 중요한 것은 ‘의심(사유)의 태도’다. 의심해야 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을 의심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는 태도.
데카르트가 남긴 유산은 ‘코기토’라는 철학적 개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의심할 수 있는 용기’다. 익숙함, 편안함과 결별하고, 낯섦, 불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들까지 과감하게 의심할 수 있는 용기. 데카르트에게 배워야 할 것은 엄격하게 생각(의심)하는 태도와 권위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다. 그런 태도로 우리에게 집요하게 들러붙은 편견을 하나씩 떼어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조금 더 밝고 유쾌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