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속 데카트르>

철학에는 ‘실체’, ‘사유’, ‘연장’이라는 개념이 있다. 먼저 ‘실체’라는 개념부터 파악해 보자. ‘실체’는 모습이 바뀌고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특징)을 의미한다. 즉 ‘실체’는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영원한 본성을 가진 것이다. 컵 속에 있는 물을 생각해 보자. 컵 모양에 따라 물의 모양은 달라지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컵에 따라 여러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물 자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물 자체를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모든 사물에는 두 가지 ‘실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사유’와 ‘연장'이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란 것은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연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연장’은 물질, 물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공간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는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사유적 성질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철학 체계 안의 모든 것은 ‘정신(사유)-물체(연장)’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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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육체라는 ‘연장’과 정신이라는 ‘사유’, 두 가지 실체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데카르트는 사유(정신)를 연장(육체)보다 우선했다는 점이다.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나,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정신은 물체와 전적으로 다른 것이며, 심지어 물체보다 더 쉽게 인식되고, 설령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신은 스스로 중단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나’(주체)란 ‘생각하는 나’, 곧 ‘정신(이성)’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 데카르트에게 ‘육체(연장)’는 골칫거리였다. ‘남의 것을 훔치면 안 된다’는 것을 ‘정신(이성)’은 분명히 안다. 데카르트에게 ‘이성(정신)’은 완벽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까? 때로 인간은 남의 것을 훔친다. 즉, 인간의 ‘이성(정신)’은 완벽한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이 있다. 데카르트는 이 논리적 모순을 육체(연장)로 해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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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인간의 정신은 완전한데 현실에서 인간의 정신이 완전치 않은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는 육체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체를 갖고 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본능(배고픔), 감정(질투), 욕망(훔치고 싶다) 같은 것들이 이성을 교란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정신(이성)’이 완전성을 발휘하려면 ‘육체(연장)’적인 면을 통제하고 억압해야 한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도덕학을 최고의 학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데카르트에게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엄격한 도덕적 규칙에 따르게 할 때 육체적인 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니까.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정신이 육체를 잘 지배하기 위해서 육체를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체에서 생겨나는 본능, 감정과 욕망을 규제하고 그 힘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육체에 관해 잘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데카르트의 『관념론』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 한 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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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철학 자체보다 그의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정신적인 것(독서, 사색)은 고상하고 훌륭한 것이고, 육체적인 것(섹스, 잠)은 천박하고 억눌러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여전히 있지 않은가?


현대철학의 핵심 테마 중 하나는 ‘몸’이다. 이는 서양의 근대 철학이 얼마나 ‘이성’ 중심주의 빠져 있었는지를 성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에드문트 후설’로부터 시작된 ‘현상학’이라는 철학 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을 이어받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는 ‘이성’ 중심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아파트를 걸어 다닐 때, 그 아파트가 나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여러 가지 국면들이 있다. 이는 제각각 여기서 또는 저기서 보인 아파트를 표상한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 자신의 운동을 내가 의식하지 않고 나의 신체를 그 운동의 단계들을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 내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 국면들은 동일한 사물의 다양한 측면들로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아파트를 생각으로 훑어볼 수도 있고 상상할 수도 있으며 또는 종이 위에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라고 해도 나는 신체적 경험의 매개가 없다면 대상의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 퐁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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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직접 보지 않은 아파트를 그릴 수 있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데카르트라면 인간의 정신(이성)은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다. 인간이 보지 않은 아파트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신체적 경험의 매개” 즉 몸이 언제가 그곳에 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정신’은 ‘육체’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평생 산에서 살던 아이가 어떻게 아파트를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정신이 신체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정신을 추동한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은 인식하고 사유하는 정신적인 존재이기보다, 근본적으로 몸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규명했다. 이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근본부터 뒤집는 논의인 셈이다.


데카르트는 틀렸다. 인간은 정신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존재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몸(신체적 경험)을 매개한 생각일 뿐이다. 정신(생각)을 앞세우지 말라. 몸(감각)으로부터 시작하라! 이것이 현대철학이 근대철학을 반성하며 나온 성찰 중 하나이다. 정신과 관련된 것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으로, 육체와 관련된 것은 참고 억눌려야 할 것으로 믿는 것은 데카르트가 남긴 편견은 아닐까?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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