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계약에서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계약을 맺고 산다. 일을 할 때도(노동계약), 집을 사거나 빌릴 때도(임대차 계약), 저축을 하거나 상품을 살 때도(금융계약), 보험을 들 때도(보험계약), 계약을 한다. 이러한 계약은 사회적 약속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약속은 우리가 흔히 하는 사적인 약속과 무엇인가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딱히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무엇인가 부당한 것 같고, 모종의 압박감 또한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왜 그런 것일까? 가장 먼저 어떤 약속에서 모종의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자발적이지 않은 약속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받을 때,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맺은 계약 중 자발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노동계약을 예로 들어보자. 직장을 구할 때 맺는 계약은 자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장에서 계약대로 일을 하면서도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곤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약속에서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경우가 있다. 바로 약속 내용을 숙지하지 않은 경우이다. 임대차 계약을 예로 들어보자. 집을 빌리면서 계약서 조항을 꼼꼼히 확인해 보지 않았다면,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숙지하고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기묘한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곤 한다.
약속에서 부당함과 압박감을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엄격함이다. 즉 사회적 약속(계약)이 사적인 약소보다 더 엄격한 약속이기 때문에 모종의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쉽게 말해, 친구나 가족과의 약속은 쉽게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 있지만, 사회적 약속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인 걸까? 이는 일견 타당한 이유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라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계약에서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홉스의 ‘자연’ 상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토마스 홉스에게 들어보자. 서양 근대철학의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데카르트가 인간의 ‘이성(코기토)’을 발견한 일이었고, 또 하나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출현이었다. ‘코기토’의 발견으로 신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적 공동체가 쇠락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공동체에 대한 필요가 제기되었다. 홉스는 이러한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사회계약론’을 기초 세웠다. 홉스는 ‘계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홉스의 ‘계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약’ 이전의 상태, 즉 어떤 문명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홉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자연은 인간이 육체·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모두 합한다면, 인간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홉스는 근대철학자답게 인간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 측면에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마다 완력과 지성의 차이가 있다. 즉 조금 더 힘이 세거나 조금 더 똑똑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 상태에서 더 큰 이익을 가져갈 수 있을 만큼의 완력과 지성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다. 쉽게 말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능력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평화로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홉스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참혹한 ‘자연’ 상태를 가정한다.
인간의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은 오로지 그 자신의 이성의 지배를 받을 뿐이며, 그 적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이용할 수 없는 것,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만인은 만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까지도 권리를 갖는다. 이처럼 모두가 만물에 대해 이와 같은 자연의 권리를 갖고 있는 상태가 존속하는 한, 자연적 삶의 시간을 다 누릴 수 있는 안전은 어떠한 인간에게도 보장되지 않는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모든 이의 모든 이에 대한 전쟁상태’ 이것이 홉스의 ‘자연’ 상태를 함축하는 말이다. 자연 상태 아래서 모든 인간은 거의 평등한 능력을 갖는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본성상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달리 말해, 인간은 자신의 “적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하지 못할 일은 없다. ‘자연’ 상태는 모든 사람이 “만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가지는” 상태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홉스의 ‘자연’ 상태는 능력이 비슷한 이들끼리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복속시키려는 전쟁상태인 것이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 상태는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o momini lupus.”인 상황인 셈이다. 그리고 이 전쟁상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능력(완력과 지성)이 비슷한 이들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상태는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홉스의 ‘계약’ 상태
근대철학자인 홉스는 이러한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해 ‘계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중세는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한 ‘계약’ 따위는 필요 없었다. 중세에는 모든 인간을 지배할 공통의 권력이 신神에게서 나오고, 그것을 현실에서 왕이 이어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왕권신수설). 하지만 신이 사라진 근대에는 ‘자연’ 상태, 즉 전쟁상태를 종식하기 위한 새로운 공통의 권력이 필요했다. 홉스는 그 권력이 바로 사회적 계약을 통해 확립된다고 생각했다(사회계약설).
홉스의 생각은 간명하다. ‘계약’을 통해 인간들의 이기심을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합의할 때, 비로소 야만적인 ‘자연’ 상태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늑대(인간)’들이 서로 약속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괴물(권력)’을 불러들이는 상황이다. 홉스는 그 ‘괴물’을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의 이름을 빌려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른다. 홉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공통의 권력은 외적의 침임과 상호 간의 권리 침해를 방지하고, 또한 스스로의 노동과 대지의 열매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여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홉스의 ‘계약’은 ‘공통의 권력’을 마련하는 행위이다. 즉 신이나 왕에게서 나오는 권력이 아닌, 인간들이 서로 계약을 하여 ‘공통의 권력’을 선출하는 것이다. 이런 계약을 통해 마련된 ‘공통의 권력’은 외적의 침임을 막고, 시민들 상호 간의 권리 침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쾌적한 생활을 보장한다. 이러한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해서, 그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이다. 홉스는 이러한 ‘계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는 동의 혹은 화합 이상의 것이며, 만인이 만인과 상호 신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동일 인격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만인이 만인과 상호 신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공통의 권력’을 선출하는 일은 단순한 “동의 혹은 화합 이상의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동일 인격으로 결합되는” 일이다. 즉, 홉스에게 국가는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들의 인격이 더해져 이뤄진 거대한 인격체인 셈이다. 이러한 ‘계약’을 맺는 일은 합리적이고 심지어 지혜로운 일처럼 보인다. 야만적인 ‘자연’ 상태 아래서의 전쟁을 종식하고, 서로 평화롭고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확실하고 영원한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홉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리바이어던’, 인간을 집어삼키는 ‘괴물’
이것(상호 신의 계약)은 마치 만인이 만인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과 같다. ‘나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혹은 이 합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단 그대도 그대의 권리를 양도하려 그의 활동을 승인한다는 조건 아래.’ 이것이 달성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 되었을 때, 그것을 ‘국가commonwealth’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이 탄생하게 된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인간들이 ‘공통의 권력’을 선출하기 위해 ‘상호 신의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자신을 다스릴 권리를 한 사람 혹은 한 합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홉스는 이것이 달성된 상태가 바로 ‘국가commonwealth’ 즉 모두Common의 복지wealth가 달성된 상태라고 보았다. 그 ‘국가’ 상태가 바로 무소불위의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이다.
그런데 이 ‘리바이어던’에게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양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는 더 이상 자신의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한 번의 계약을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지배자는 어떤 통제도 받지 않으며, 계약 당사자들의 권리를 얼마든지 침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권력을 양도받은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합의체”의 통제가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계약을 물리거나 저항할 수 없다. 홉스가 제안한 ‘국가’ 체제 안에서 ‘국민’의 역할은 최초에 군주를 선출함과 동시에 완전히 끝난다.
국가, 해약 불가 계약
말하자면, ‘리바이어던’을 불러내는 홉스의 ‘계약’은 해약 불가 계약인 셈이다. 이는 ‘늑대(인간)’들이 서로 약속해서 ‘괴물(국가)’을 불러왔지만, 일단 ‘괴물(국가)’이 등장한 이후에는 ‘늑대(인간)’들은 ‘괴물(국가)’을 통제할 어떤 수단도 없고, 그저 ‘괴물(국가)’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홉스에게 이는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국가’가 이기적인 인간에게 ‘계약’을 파기할 기회를 준다면, 다시 ‘자연’ 상태, 즉 야만적인 전쟁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홉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칼 없는 계약이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을 보호할 힘이 전혀 없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이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지 않은가? 지금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代議 민주주의 체제(대통령제·의원내각제)이다. 즉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표자(대통령·총리·국회의원)를 선출하여, 그들이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대표자를 선출하고 나면 일정 기간 국민은 그 대표자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대표자가 부당한 지배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대표자를 뽑은 ‘계약’을 좀처럼 파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 계약은 파기하기 어려울까? 이는 단지 외적인 힘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즉 ‘괴물(국가)’의 힘(권력)이 국민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대표자에게 좀처럼 저항할 수 없는 내적인 이유도 있다. 홉스의 ‘계약’은 국민들 스스로가 선택한 지배 권력에 복종하기로 합의한 계약이다. 즉, 선출된 권력이 부당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권력을 우리 스스로가 선출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저항하기 어렵다.
국가는 신앙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역사상 최악의 권력자인 히틀러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자국민을 학살하려 친위 쿠데타를 실행했던 윤석열도 모두 정당한 계약(선거)을 통해 당선되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중세의 ‘왕권신수설’과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외피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신’이 주신 권력 앞에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듯, ‘계약’을 통해 합의된 권력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홉스는 계약을 통해 탄생하게 된 국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영원불멸의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중세의 권력이 ‘하늘의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홉스의 권력은 ‘지상의 신’, 즉 국가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다. ‘하늘의 신’이든, ‘지상의 신’이든, 결국 이는 한낱 인간이 감히 거부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절대자(신!)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국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여기지 않는가. ‘국가’라는 체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두 의무인 납세와 병역을 신성神聖한 의무로 표현하는 일은 ‘국가’에 대한 무의식적 신앙심을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계약’이 부당한 이유
이제 우리는 왜 ‘계약’에서 모종의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지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계약은 하나의 근본적인 계약으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국가’라는 ‘계약’이다. 노동계약, 임대차 계약, 금융 계약 등등. 이는 모두 ‘국가’라는 근본적인 계약이 없다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계약들이다. 그런데 이 국가 ‘계약’ 자체가 이미 부당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떤 약속이 정당 하려면, 가장 먼저 자발성과 자율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민’ 중에 ‘국가’라는 ‘계약’을 자발적으로 맺은 이들이 있는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그 계약서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이도 없다. 또한 ‘국민’ 중 ‘국가’라는 계약을 해약할 자유가 있는가? 없다. ‘국민’은 그저 태어나는 순간부터 ‘국가’라는 해약 불가능한 계약 속에 발 묶이게 된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들에게 ‘칼’을 들고 계약을 이행하라고 겁박한다. 국가 ‘계약’이라는 근본적 계약 아래서 맺은 모든 계약에서 모종의 부당함과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하지 않은 약속을 전제로 맺어진 약속은 모두 부당하다. 또한 그 전제된 약속(국가)이 항상 ‘칼’을 들고 있기 때문에 모든 약속에서 기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는 이미 신성시되었고, ‘국가’ 없는 상태는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리는 어떻게 정당한 계약을 맺을 수 있을까? 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는 홉스의 ‘계약’이 애초에 잘못된 계약임을 밝혀내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홉스의 ‘계약’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바로 그가 정의한 인간의 본성이다.
생명의 본성은 무엇인가?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본성(본능)이 철저한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항상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래서 국가라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인간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는 사실일까? 인간의 본성은 정말 철저한 이기심인가? 근대를 넘어 현대에서 가장 탁월한 철학을 보여주었던 철학자 중 한 명인 베르그손은 이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본능은 공감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생명체의 본성(본능)이 ‘공감’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본성은 이기심이 아니라 타자와의 공감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베르그손은 벌이나 개미와 같은 막시류를 예로 든다. 벌은 본능(타자와의 공감)이 극대화된 생명이다. 수만 마리의 일벌은 기하학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벌집을 짓고, 여왕벌을 돌보며, 적이 나타나면 주저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 이는 벌의 본능이 타자(동료 벌)와의 ‘공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벌의 ‘공감’ 능력(본능)이 항상 이타적 행위로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맵시벌은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기 위해 귀뚜라미 애벌레를 사냥한다. 그런데 이때 맵시벌은 먹잇감의 몸에 정확히 세 개의 신경절만을 침으로 공격한다. 너무 깊이 찌르면 먹잇감이 죽어서 부패해 버리고, 덜 찌르면 새끼들이 먹기 전에 먹잇감이 도망가기 때문이다. 이는 타자(먹잇감)와 정확한 감응(공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공감’이라는 본능은 때로 이기심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도 이타심도 아닌 ‘공감’이다.
그런데 이는 특정한 곤충에 관한 이야기일 뿐, 진화의 정점인 인간에게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절지동물에서 본능을 향해 거침없이 진화했지만, 거의 모든 척추동물이 지성을 활짝 꽃피우기보다 그것(본능)을 추구하는 것을 볼 뿐이다. 척추동물의 심적 활동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여전히 본능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자연’ 상태에서 ‘본능(공감)’을 향한 진화의 끝에는 절지동물(개미·벌)이 있다. 반면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척추동물은 ‘지성’을 향해 진화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인간 역시 벌처럼 ‘본능’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척추동물)의 “심적 활동의 기반이 되는 것은 여전히 본능(공감)”이다. 인간 역시 생명이기에 근본적으로 ‘공감’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어떤 생명체이든, 진정으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바로 ‘공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도 이타심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공감’일 뿐이다. ‘공감’이라는 본능이 때로는 이기심으로, 때로는 이타심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때로 맵시벌처럼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때로 ‘공감’ 능력을 활용해 타자를 공격하기도 한다. 전쟁에서 상대의 미묘한 표정과 움직임에서 약점을 간파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능(공감)’ 덕분이다.
하지만 일부 인간은 때로 일벌들처럼 ‘공감’ 능력 때문에 타자에게 헌신하기도 한다. 홉스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가족을 위해, 인류를 위해, 대의大意를 위해 자신의 유익을 기꺼이 포기하는 이들이 있다. 베르그손의 논의에 따르면, 이들의 행위는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닌) 본능(공감)을 통한 자기보존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여왕벌이 벌이 죽으면 자신 역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일벌처럼,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가 사라지면 자신 역시 생존할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인간도 있다. 이처럼 진정한 자기보존은 때로 ‘공감’을 통해 자신의 유익을 기꺼이 포기할 때 이뤄지기도 한다.
‘괴물’이 아닌 ‘추장’이라는 대표자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두 번째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이론이다. 첫 번째 단추는 인간의 본성이 자기보존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옳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것을 제일 목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자기보존이라는 본성이 항상 타자를 지배하려는 야만적 이기심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홉스의 두 번째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
‘자연’ 상태에서 자기보존을 실현하려면 ‘공감’적인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유사 이래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하려 했던 이유는 서로 계약을 맺어 압도적인 권력을 선출하여 서로를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로 함께 살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가 존재하기 전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원주민 사회에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 직접 원주민 사회를 경험했던, 인류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족사회에는 왕이 없고 국가의 추장이 아닌 단지 추장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추장이 일체의 권력과 강제력,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추장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니며, 부족민들은 복종해야 할 어떤 의무도 갖고 있지 않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원주민 사회에도 대표자가 있다. 바로 ‘추장’이다. 그런데 이 ‘추장’은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부족민은 추장에게 복종해야 할 어떤 의무도” 없다.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추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추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괴물(지배자)’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어른(중재자)’이다. 즉 ‘추장’은 부족원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부족들에게 ‘공감’하며, 그 ‘공감’을 바탕으로 부족원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를 중재하는 대표자일 뿐이다.
‘국가’가 국민의 ‘계약’에 의해 선출된 폭압적 ‘괴물’(전제군주)이라면, ‘추장’은 부족민들의 ‘공감(존중·존경)’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은 ‘어른’이다. ‘추장’은 ‘공감’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자이다. ‘자연’ 상태에서 반드시 ‘국가(괴물)’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추장(어른)’이 등장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정당한 계약을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권력으로 ‘지배’하려는 ‘괴물’이 아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공감’하려는 ‘추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