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속 토마스 홉스>

플라톤이 ‘철인哲人(지혜로운 자)’이 군주가 되기를 바랐다면, 홉스는 ‘철인鐵人(강력한 권력자)’이 군주가 되기를 바랐다. 철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유의 퇴행처럼 보인다. 이미 고대 철학자가 ‘지혜’로써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고 말했건만, 근대에 이르러 ‘폭력’으로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는 홉스의 주장은 얼마나 유아적인 발상인가? 그래서일까? 서양철학사를 정리한 러셀은 홉스가 일류 철학자의 반열에는 오르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홉스)의 철학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류 철학자의 지위에 오르기 힘든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그는 난해하거나 미묘한 문제를 다루게 되면 참을성이 부족해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방식으로 과격하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그는 원기 왕성하지만 세련된 기교가 부족한 학자로서, 예리한 쌍날칼이 아니라 무딘 전투용 도끼를 휘두른다.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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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는 예리한 칼로 주어진 문제를 섬세하게 파헤치기보다 무딘 전투용 도끼로 휘둘리는 철학자다. 복잡하게 뒤엉킨 매듭(고르디우스 매듭)이 있을 때, 그것을 섬세하게 한 올 한 올 풀기보다 투박한 도끼로 매듭을 끊어버린다. 홉스의 이런 철학적 한계는 어디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바로 극단적 유물론이다. 이에 관한 홉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철학이란 이미 알려진 원인이나 혹은 (무엇을) 생산해 내는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작용이나 현상을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미 알려진 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무엇을) 생산해 낼 가능성이 있는 근거를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런데 작용과 현상은 물체의 소질이나 능력이다. 『철학의 요소들Elementorum Philosophiae』 「물체론De Corpore」 토마스 홉스


홉스는 극단적인 물질주의자이다. 홉스에게 철학은 “작용과 현상”에 관한 것이다. 즉, 어떤 원인에 해서 발생하는 작용이나 현상을 밝히거나 혹은 반대로 밝혀진 작용이나 현상을 바탕으로 특정한 원인을 밝히는 것이 철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작용과 현상이 모두 “물체(물질)의 소질이나 능력”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홉스에게 철학은 ‘물질’의 발생에만 관계하는 것이고, ‘물질’이 없다면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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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작용과 현상”은 모두 ‘물질’적인가? 그렇지 않다. 세계는 감각할 수 있는 ‘물질’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감각할 수 없는 비물질적인 것들, 예컨대 사유나 마음 혹은 진동이나 리듬 역시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홉스는 그런 비물질적인 것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홉스의 이러한 극단적인 유물론은 인간을 보는 관점까지 나아간다.


홉스에게 인간은 그저 ‘물질’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과 그로 인한 감각의 반작용적 힘이 작용하는 것일 뿐이다. 홉스에게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기계장치일 뿐이다. 홉스에게 인간의 자유는 없다. 자유라는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유가 갖고 있는 과격함 혹은 투박함은 바로 이런 극단적 물질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극단적 유물론은 반드시 폭력적인 양상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홉스는 모든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가 필요불가결하다고 보았다. 이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인간을 어쩔 수 없이 매나 칼을 들어야만 말을 듣는 존재라고 본 셈이다. 이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처럼 극단적 물질주의는 반드시 비인간적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는 30년 동안 폭압적인 권력으로 독재를 자행한 스탈린이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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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물질의 산물이며,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뇌의 산물이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 조셉 스탈린


스탈린 역시 홉스와 마찬가지로 극단적 유물론을 견지하고 있다. 스탈린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단지 “물질의 산물”일 뿐이며,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뇌(물질)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사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두 ‘물질’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다.


자본주의에는 여러 폐해가 있다.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스탈린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 스탈린은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게 만드는 ‘물질’적 토대(상품·화폐·시장…)를 모두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발상은 필연적으로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 유물론자들은 ‘물질’이 ‘마음’을 만들기 때문에 ‘물질’을 통제하기만 하면 ‘마음’ 역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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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주의자들은 흔하다. 그들은 반드시 크고 작은 폭력과 독재를 행사하게 된다.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사장(아버지)을 생각해 보라. 그는 삶의 의미를 앗아가는 노동(학업) 때문에 우울하고 답답한 직원(자녀)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사장(아버지)의 세계관에서는 돈(물질)이 있으면 당연히 마음마저 편해져야 한다. 그 사장(아버지)은 그 직원(자녀)을 보며 한심하다거나 나약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장(아버지)이 직원(자녀)에게 윽박지르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필연적 귀결 아니겠는가. 이처럼 극단적 유물론은 국가적 차원이든, 일상적 차원이든, 필연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세계는 ‘물질’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비물질적 것들 역시 존재한다. 서양 현대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베르그손은 ‘물질은 곧 운동이며, 그 운동은 일정한 리듬을 가진 진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진동(비물질)’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이라는 ‘물질’은 특정한 빛의 진동(파동)인 것처럼 말이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비물질(진동)이 ‘물질’의 근본이든, 아니면 ‘물질’과 별개로 비물질(마음·사유)이 존재하든, 세계에는 진동과 리듬(음악)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사유와 마음이 있다. 이러한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폭력적인 야만의 세계를 비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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