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SNS에 열광하는가?
바야흐로 SNS의 시대다. 운동을 하던, 음식을 먹던, 여행을 가던, 영상이나 사진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하는 일은 흔하다. 인스타그램에 매일 사진을 올리는 사람도 있고, 메신저 프로필사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바꾸는 이들도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그들의 대답은 다들 비슷하다. ‘사진 찍는 게 좋아서’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날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 이들의 말은 사실일까?
‘사진 찍는 게 좋아서’라고 말한 이들은 유심히 살펴보자.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장을 안 한 날, 혹은 후줄근한 장소와 음식 앞에서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일까? 순수하게 추억을 잘 간직하고 싶다면,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서 혼자 소중히 간직하면 될 일이다. 좋은 추억을 더 만들 수 있는 시간에 사진을 편집해서 기어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날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라는 말은 어떤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 꼭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거나 메신저 프로필사진을 바꾸어야 하는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SNS에 사진이나 올리는 것보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게 더 나은 선택 아닌가? SNS에 집착하는 이들의 속내에는 무엇인가 다른 마음이 있다.
파스칼의 ‘심정'
세상 사람들이 SNS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블레이즈 파스칼’에게 들어보자. ‘왜 SNS에 집착하는가?’ 이 질문에 파스칼이라면 이렇게 답해줄 테다. ‘인간은 허영vanity을 가진 심정cœur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영’과 ‘심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심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 이유를 가지고 있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파스칼은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이성’과 ‘심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 있다고 말했다. 파스칼이 말한 ‘심정’은 프랑스어 ‘cœur(마음·심장)’이다. 흔히, ‘심정’은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엄밀히 말해 이성으로 환원되지 않은 인식을 의미한다.
파스칼은 ‘이성’이 “기하학의 정신esprit de géométne”과 관련된 것이라면, ‘심정’은 “섬세한 정신esprit de finesse”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성’은 정의와 명백한 원리에 의해 올바른 추론을 하는 능력(논리적‧수학적 능력)이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적이고 보편적 능력을 의미한다. 즉, “기하학의 정신(이성)”은 배우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심정’, 즉 “섬세한 정신”은 어떤가? 이는 한 사람의 고유한 능력이다. 이 ‘심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심정)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으며, 눈으로 본다기보다 오히려 느끼는 것이다. … 기하학에서처럼 그것들 순서에 따라 조리 있게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심정’은 개인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직관적 감성(감정)과 그에 따른 판단 능력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심정’은 감정(느낌)적 인식 혹은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심정’은 어떤 대상이 주어졌을 때, 기하학(논리)적으로 왜 그런지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 대상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정신이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이성’적으로 규명(논증)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나 예술, 신앙 같은 영역은 ‘이성’으로 규명(논증) 불가능하다. 이는 오직 ‘심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심정’이 ‘이성’만큼 확실하거나 명료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정’은 혼란하고 불투명한 그래서 즉흥적인 감성(감정적) 판단 능력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예술, 신앙 같은 영역이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판단)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파스칼의 그 유명한 전언,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나온다.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분명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 하지만 그 ‘이성’은 데카르트가 말한 절대적이고 분명한 ‘이성’이 아니다. 즉 삶과 세계의 진실에 대해 확실하고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이성’은 아니다. 파스칼의 ‘이성’은 연약해서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갈대(심정)에 근간을 둔 ‘이성’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분명하고 명료한 ‘이성’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심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는 철학사적으로 데카르트에 대한 공격이다.
데카르트는 ‘코기토’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그래서 합리적이고 투명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스칼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박한다. 삶의 진실에 더 가까운 건, 데카르트가 아니라 파스칼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심정’적 존재인가? 데카르트의 믿음과 달리, 이성(논리학·수학·의학)적 훈련을 받은 소수의 이들만이 ‘이성’적으로 사유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특정한 대상을 ‘심정’, 즉 혼란하고 불투명하고 즉흥적으로 인식(판단)할 뿐이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이 했던 말과 행동들 전체를 논거로 삼아 ‘이성’적으로 그를 판단하는가?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몇 가지 특정한 말과 행위를 통해 형성된 첫인상 근거로 그를 판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는 혼란하고 불투명하고 즉흥적으로 ‘심정’의 결과이다. 이처럼 인간은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극히 ‘심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파스칼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규명하려 한다.
파스칼의 ‘허영vanity’
심정이 스스로 어떤 것에 관심을 쏟느냐에 따라 자연적으로 보편적 존재를 사랑하거나 혹은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파스칼에 따르면,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가닿게 되는 곳이 둘 중 하나다. ‘신’ 혹은 ‘나’이다. 불투명하고 혼란스럽고 즉흥적인 ‘심정’에 영향을 받는 인간은 결국 보편적 존재(신)를 사랑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나)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상 ‘심정’에 휩싸여 불투명하고 혼란하며 즉흥적으로 사는 이들이 살펴보라. 그들이 끝내 향하는 곳은 ‘신앙’이나 ‘예술’이다. 이는 ‘신앙’은 ‘신’을 사랑하는 일이고, ‘예술’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심정이 어떤 것에 관심을 쏟느냐에 따라 자연적으로 보편적 존재(신)를 사랑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나)을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두고, ‘나’를 사랑하게 되는 상황에 집중하자. 인간은 ‘심정’에 휘둘리는 존재이기에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하나가 이어진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타인도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심정’적인 존재이기에 결국 타인의 사랑을 집요하게 갈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허영’이라는 감정이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인간은 ‘심정’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픈 욕망과 연결된다. 이 연결을 통해 인간은 ‘허영’에 휩싸이게 된다. ‘허영’에 대해서 파스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군인도, 심부름꾼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신의 찬양자를 원한다. 영예의 헛됨에 관해 글을 쓰는 자도 훌륭하게 글을 썼다는 영예를 원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한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허영’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본 데카르트가 순진하다면, 인간을 허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심정’적 존재로 본 파스칼은 냉정하다. 파스칼은 냉정하기에 날카로운 측면이 있다. 파스칼은 모든 인간은 허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차가운 진단을 내리고 있다. ‘허영虛榮’은 말 그대로 ‘비어 있는虛’ ‘꽃榮’이라는 의미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 비어 있는 꽃이 바로 ‘허영’이다.
‘허영’은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아름답게 꾸미려는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야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왜 세상 사람들이 SNS에 집착하는지에 답할 수 있다. “인간은 허영(虛榮, vanity)을 가진 심정(cœur)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SNS 열광하는 진짜 속내는 사진 찍는 게 좋아서도,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허영’ 때문이다.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자신을 꾸미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속은 비었지만 겉은 화려한 꽃처럼 보여서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것이다. 이런 ‘허영’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 공허하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있는 불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즐겁고 만족을 느낀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공허, 그것은 인간이 처한 실존적 조건이다. 그 공허함 때문에 우리는 ‘허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네 마음을 잘 돌아보라. “주위에 있는 불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하루 종일 즐겁고 만족을 느끼지 않는가? 모든 인간은 허영적인 존재다. 아름다운 외모에 집착하는 것만 허영인가? 아니다. 그 반대도 허영이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야”라는 말도 때로 허영이다. 어린 시절부터 못생겼다고 구박받고 자랐던 사람은 훌륭한 성적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성적이 나쁘다고 구박받고 자랐던 사람은 착한 마음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도 정의롭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 것이며, 독재자 박정희도 위대한 지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 것이다. ‘초야 붙여서 살고 싶다’는 취지의 책을 쓴 철학자도 그 책에 자기 이름이 빠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이처럼, 어떤 인간도 ‘허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셀카는 일종의 자해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 ‘허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할까? 달리 말해, 지금처럼 셀카를 찍으며 SNS에 열광하면 살아도 좋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철학자 한병철은 ‘셀카와 자해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회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밖에서는 셀카를 찍고 집에 들어가서는 자해를 하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놀랍게도, ‘셀카’와 ‘자해’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사람들의 관심·인정·칭찬(자극)이 없으면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에 SNS(셀카)를 하는 것과 육체의 고통(자극)이 없으면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에 자해하게 되는 것. 이 두 현상의 내적 메커니즘은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뿐인가? ‘셀카’를 통해 얻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인정·칭찬은 육체적 고통(자해)만큼이나 우리네 삶에 큰 자극으로 기능한다.
그뿐인가? ‘셀카’와 ‘자해’는 모두 점점 더 큰 자극을 추동한다는 측면에서도 닮아있다. 또한 이 둘은 모두 끝내 자기 파괴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측면에서도 닮아있다. SNS에 사진을 올리면서 동시에 근사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SNS을 끊임없이 엿본다. 그 사이에 나의 근사함과 행복이 덜 한 것 같아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해 보이는 셀카를 찍으려 기를 쓴다. 이 악순환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자해와 얼마나 다른 걸까?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해하는 영상을 찍는 사람들이 있으니, ‘셀카’와 ‘자해’의 연관성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영의 극단, ‘관종’
허영을 채우기 위한 SNS는 가급적 안 하는 편이 좋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날조해 사람들의 관심, 인정, 칭찬을 받으려는 것은 필연적으로 더 큰 불안, 허무, 그리고 외로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꽃’을 생각해 보라. 그걸 잠시 보는 사람이야 좋을지 몰라도, 그 꽃 자신은 얼마나 불안하고 허무하고 외로울까?
시쳇말 중에 ‘관종’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성을 상품화하거나 심지어 자해하는 영상을 찍어 공개하기도 한다. 즉 ‘허영’을 아무런 성찰 없이 탐닉한 결과가 ‘관종’인 셈이다. 그러니 허영을 채우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은 가급적 하지 않는 편이 더 건강한 삶이다.
그런데 의구심이 든다. 그게 가능할까?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허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러니 셀카든, SNS이든 뭐든 사람들의 관심·인정·칭찬을 얻기 위한 허영적인 행위들을 멈출 수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인간은 허영 때문에 더 큰 불안, 허무, 외로움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허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분명 ‘심정’적 존재니까.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통찰을 빌리자. 호네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인정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즉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만족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호네트는 그 과정을 하나의 싸움이라고 말하며, ‘인정투쟁Kampf un Anerkennung’이란 개념을 말한다. 호네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한 주체는 다른 주체에게 인정받을 때에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새롭게 획득된 정체성은 더 높은 인정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더 높은 인정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차원의 투쟁이 전개된다. 『인정투쟁』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은 무엇인가? 서로 타인의 인정(관심·칭찬)을 더 받으려 아귀다툼을 벌이는 일이 아니다. 인정에는 층위가 있다. 낮은 수준 인정이 있고, 높은 수준의 인정이 있다. 아름다운 외모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녀는 SNS를 통해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아름답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몇 해를 짝사랑했던 이에게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 전자는 낮은 수준의 인정이고, 후자는 높은 수준의 인정이다. 이때 낮은 수준의 인정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인정을 받으려는 투쟁! 이것이 바로 ‘인정투쟁’이다.
이는 분명 어려운 투쟁이다. 익명의 존재에게 받는 인정에서 소중한 한 사람에게 받는 인정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싸움이다. 왜 그런가? 소중한 한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익명의 존재에게 받는 인정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정적인 사진을 올리면 손쉽게 익명의 존재들에게 인정(관심·칭찬)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사진을 소중한 이는 싫어할 수 있다. 이는 그녀가 소중한 이에게 인정(관심)은커녕 무관심과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이제 투쟁해야만 한다. 낮은 수준의 인정을 포기하고, “더 높은 인정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차원의 투쟁이 전개”해야만 한다. 섹시한 옷이나 수영복을 입은 사진으로 손쉽게 얻던 ‘인정(관심·칭찬)’을 포기해야 한다. 음악과 미술, 철학을 좋아하는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제 음악회와 전시회, 그리고 서점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렇게 투쟁하다, 끝내는 음악회, 전시회, 서점에서 찍은 사진이 아닌, 그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철학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정을 담은 글을 써서 그에게 보내야 한다. 그렇게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인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싸움을 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인정투쟁’이다.
어떤 허영을 선택할 것인가?
허영은 사람들에게 관심·인정·칭찬 받고 싶은 감정이다. 이 감정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여전히 선택권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허영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허영의 종류를 선택할 수는 있다. ‘어떤 사람에게 관심, 인정, 칭찬을 받을 것인가?’라는 선택권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관심·인정·칭찬을 받고 싶은 대상에 따라, 즉 허영을 만족시키려는 대상에 따라 우리네 삶은 달라진다.
그 대상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그 대상은 ‘피상적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를 맺는 존재여야 한다. 낮은 수준의 인정을 받아서 허영을 충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허영의 충족 끝에는 반드시 더 깊은 불안, 허무, 외로움에 휩싸이게 된다. SNS가 내면의 자해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 대상이 언제나 ‘피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이다. SNS는 익명의 존재들에게 관심·인정·칭찬을 받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기에 그 끝에는 필연적으로 불안·허무·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허영이 삶을 파괴하는 건 아니다. 높은 수준의 인정을 통해 충족된 허영은 기쁜 삶을 약속한다. 친구나 연인과 같은 소중한 이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삶에 불안·허무·외로움 같은 슬픔의 감정은 없다. 익명의 존재에게 ‘인정(관심·칭찬)’받기 위한 ‘비키니’ 사진이 아니라, 오직 ‘너’에게 ‘인정(관심·칭찬)’받기 위해 ‘로스코’의 작품을 올릴 때 삶은 조금 더 기쁘다. 그렇게 ‘너’를 위해 ‘로스코’의 사진을 찍다가 어느 날 마음이 일렁일 수 있다. 그 마음을 담은 짧은 편지를 너에게 써서 ‘인정(관심·칭찬)’받을 때, 허영은 비로소 진정한 기쁨이 된다.
오직 사랑 속에서만 허영이 행복이 된다.
‘진정한 관계’는 언제나 ‘사랑의 관계’다. 그 ‘사랑의 관계’에서 허영은 기쁨이 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를 알고 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허영이다. 하지만 그의 허영은 불안·허무·외로움이 아니라 충만감·행복함을 느끼게 해준다. 왜 그런가? 그는 자신이 찍었던 사진을 짧은 편지와 함께 소중한 이들에게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허영은 ‘진정한 관계’ 속에서 충족되는 허영인 셈이다.
허영이 불가피하다면, 허영으로 기쁜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사랑의 관계’를 찾고 복원해야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화장 대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아름답게 화장할 때, 익명의 존재가 넘쳐나는 SNS에 셀카를 올리는 대신 사랑하는 ‘너’에게 사진을 건넬 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잘난 체하는 글 대신 사랑하는 ‘너’에게 온 마음을 담은 편지를 선물할 때, 우리의 허영은 진정한 기쁨이 된다.
이제 우리는 왜 사랑이 삶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드는지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를 통해서만 허영이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저주처럼 뿌리내린 허영은 언제나 불안·허무·외로움으로 내몰지만,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허영만큼은 예외다. 그 허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마음껏 허영을 부리자. 오직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