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속 파스칼>

파스칼은 철학사에서 기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 ‘보편적 존재(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파스칼은 ‘인간은 심정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허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데카르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며 인간을 과도하게 치켜세우려고 했다면, 파스칼은 인간은 허영에 찌든 존재라며 과도하게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파스칼은 『팡세』 전반부에서 인간의 ‘심정’적 모습, 즉 혼란하며 변덕스럽고 잔인한 부정적 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파스칼은 왜 그랬을까? 그가 인간을 과도하게 깎아내리려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보편적 존재’인 신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다. 파스칼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참담한 존재인데 정말 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파스칼은 비루하고 부조리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신마저 없다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 혼란스럽고 잔혹해지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파스칼이 『팡세』의 후반부에 신에 매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지상에는 인간의 비참함이나 신의 자비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신을 떠난 인간의 무력함과 신과 함께하는 인간의 유능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없다.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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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신의 필요를 정당화하기 위해 허영, 탐욕, 시기, 질투, 잔혹함과 같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과도하게 부각시킬 했던 것이다. 파스칼이 인간의 허영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파스칼은 ‘인간이 허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난제가 있었다. 파스칼이 살았던 근대는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시대였다.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신을 믿게 할 것인가? 이것이 파스칼의 난제였다. 인간이 ‘심정’적 존재라는 주장만으로 신이 사라진 시대에 다시 신을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여기서 파스칼은 수학자로서의 능력 발휘하여 기발한 방법을 선보인다. 바로 확률이다. 파스칼은 근대의 언어인 수학(확률)을 통해 근대인들을 설득하려 한다.


지옥을 두려워해야만 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지옥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만일 지옥이 있다면 그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일까? 아니면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만일 지옥이 있다면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일까? 『팡세』 블레이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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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논리구조는 간단하다. 천국 혹은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죽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을 관장하는 신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은 일시적이지만, 사후 세계(천국 혹은 지옥)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파스칼의 논리에 걸려든 셈이다.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경우 중 확률적으로 어느 쪽이 더 남는 장사일까? 신을 믿는 쪽이다. 신을 믿을 때 잃은 것은 작은 것(일시적인 삶의 기쁨)이고 얻을 것은 큰 것(영원한 천국)이다. 반면 신을 믿지 않을 때 얻을 것은 작은 것(일시적인 삶의 기쁨)이고, 잃을 것은 큰 것(영원한 지옥)이다. 쉽게 말해 신(혹은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확률적으로 더 이득이다. 파스칼은 이렇게 근대인들에게 확률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득(정확히는 겁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파스칼의 확률 게임은 허황되다. 파스칼은 판돈 없는 도박을 한 셈이다. 삶은 지금 분명히 있고, 사후 세계는 지금 분명히 없다. 그런데 ‘있는 것’(삶)과 ‘없는 것’(천국과 지옥)을 동등하게 놓고 확률 게임을 펼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없는 것을 보려는 이들만이 파스칼의 확률 게임에 걸려들게 된다. “혹시 정말 영원한 지옥이 있으면 어떡하지?” 지금 없는 것을 불안에 휩싸인 이들만 판돈 없는 도박 속에서 삶을 탕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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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파스칼의 이런 종교적 기획이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파스칼은 철학사적으로 기묘한 지점에 서 있다. 그는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근대’인에게 다시 신을 필요성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래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감정적이고, 혼란하고 추악한 인간의 ‘심정’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신 앞에서 회개하는 독실한 ‘중세’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직시하고자 했던 파스칼의 노력은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중세는 ‘신’(믿음)의 시대고, 근대는 ‘이성’(논리)의 시대다. 그리고 근대 너머(현대)는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무의식’(감정·감각)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파스칼은 근대 속에서 중세를 부활시키려 애를 쓴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각시킨 인간의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심정’은 근대 너머(현대)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감각적이어서 혼란스럽고 불투명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현대’의 물살에 합류하게 한다. (프로이트‧라캉의 ‘무의식’ 베르그손의 ‘직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주름·아장스망’) ‘근대’에서 ‘중세’로 가려고 했던 파스칼의 노력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현대(탈근대)’의 문 앞으로 데려간 셈이다. 철학사도 한 사람의 인생사만큼이나 흥미롭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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