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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궁상

나는 기어이 '후기 구조주의자'가 되련다.


철학에는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라는 사조가 있다. 쉽게 말하자. ‘구조주의’는 인간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인간이 특정한 구조에 지배당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구조주의’는 낡은 것으로, ‘후기 구조주의’는 새로운 것이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구조주의’가 갖고 있는 암울한 절망감이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후기 구조주의’ 갖는 밝고 희망적인 전망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는 후기 구조주의에 매료되었다. 굳이 철학적 지향을 밝히라는 요청을 받으면, ‘후기 구조주의자’라고 말한다.


 나는 지금 다시 묻는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에서 나고 자란 내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구조는 ‘자본주의’다. 인문적 가치를 지향하는 철학을 한다고 떠들지만, 부지식불식간에 세상 모든 것들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싶다고 했을 때 흘깃 가격표를 보는, 아내가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통장 잔고를 계산하는, 친구들과 술 한잔을 할 때도 계산서 걱정을 하는 것이 내 모습이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떠들지만 나는 돈이 없어 불안해지고, 돈 걱정에 소중한 사람을 돌보지 못하기도 한다.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온다. 작년인가? 나는 ‘일과 돈에 관한 생활철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고통 말고 보통」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으로 탈고하면서 믿었다. ‘나는 이제 돈이라는 구조에서 벗어났다’ 젠장. 아니었다.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부지불식간에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돈이 없을 때 불안한 인간이다. 나의 짜증은 여기서 기원했다. 발버둥으로 조금 더 나아진 인간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예전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확인. 그것이 내가 짜증난 이유다.

    

 머리는 ‘후기 구조주의자’가 되었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구조주의자’다. 머리는 돈이라는, 자본주의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돈과 자본주의라는 구조에 포섭되어 갇혀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짜증나고 화가 난다.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가족들을 먹어야 살려한다는 불안에 그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때는 친구들에게 돈을 쓰지 못했다는 생각에 또 돈 걱정을 하고 있다.


 씨발꺼. 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가. 그놈의 돈 걱정에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불안하고 걱정만하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머리만이 아닌 몸과 마음 전체가 후기구조주의자인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 모든 일들을 돈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멈추고 싶다. 그렇게 돈이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기보다 다른 가치들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나는 기어이 '후기 구조주의자'가 되련다. 아내에게 백만 원을 보냈다. 둘째의 생일 선물을 주문했다. 이제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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