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가 훌륭한 작가일까? 글을 잘 쓰는 사람? 아니다. 누구든 쓸수록 더 잘 쓰게 마련이다. 많이 쓰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글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다 몇 권의 단행본을 세상에 내 놓으며 알게 된 사실이니, 믿어도 좋다. 훌륭한 작가는 분명 글을 잘 쓰지만, 글을 잘 쓴다고 훌륭한 작가는 아니다. 글이 훌륭한 작가를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
글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글은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인 까닭이다. 훌륭한 글은 결국 삶과 결부되어 있는 문제다. ‘어떤 작가가 훌륭한 작가인가?’라는 질문은 글과 삶의 관계성에서 답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작가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글과 삶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어야 훌륭한 작가일까?"
다이어트를 하려는 세 명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부류다. “나 이제 다이어트할 거야!”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만, 몇 년 째 그 소리다. 말만 할 뿐 그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독한 부류다. 주위 사람 누구에게도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고된 다이어트를 묵묵히 견뎌내고 난 뒤, “나 사실 몇 달 전부터 다이어트 했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아직 다이어트에 성공할 자신은 없지만 다이어트를 할 거라고 말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말하는 것을 반복하는 부류다.
첫 번째는 가장 허접한 작가다. 글과 삶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부류다. 글과 삶이 유리되었기에 글에는 어떤 울림이나 감동도 없다. 그 글에 속는 사람만 있다. 글은 자신(삶)을 드러내는 과정인 까닭이다. 글 자체를 기가 막히게 잘 써도 마찬가지다. 많은 자기계발서 작가들이 그렇다. 자신은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직장을 떠났으면서 ‘직장생활 잘하는 법’에 관한 책을 그리도 친절하게 쓴다. 그 이유, 모를 바도 없다. ‘직장을 그만두라’는 글은 팔리지도 않고, 직장에서 강연도 할 수 없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보통의 작가다. 다이어트를 완성하고 이야기하는 경우. 이 경우는 살아온 것을 쓰는 작가다. 이런 글은 울림과 감동이 있다. 어찌 안 그럴까? 글은 자신(삶)을 드러내는 과정이기에, 살아온 것을 쓰면 좋은 글이 된다. 자기계발서 작가 중에 기묘한 작가가 있다.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진솔하게 살아온 삶을 쓰는 작가가 그런 부류다. 이런 부류는 글을 앞세우지 않고, 삶으로 먼저 살아낸다. 결코 살아내지 않았던 것을 쓰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때문에 이 부류는 훌륭한 작가가 되지 못한다.
한 자기계발 작가가 있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알면 외국계 기업에서 20년을 일하고 1인 기업으로 성공한 자기계발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흔한 자기계발서 작가들과는 달랐다. 진솔하고 정직하게 삶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직장의 처세이거나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기 위한 자기계발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을 ‘사상가’로 자처했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내가 알고 있는 ‘사상가’들의 사유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했다. 그 이유를 이제 안다. 그는 살아 온대로만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세번째 부류가 훌륭한 작가다. 다이어트를 감당할 자신이 없지만 용기를 내어 여기저기 '나 다이어트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 훌륭한 작가란 어떤 사람일까? 훌륭한 작가는 때로 삶보다 글을 앞세울 수 있어야 한다. 늘 살아온 대로 써야 한다고 믿는 작가는 보통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쓰는 순간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피하고 싶은 것이다. 때로 삶보다 앞서 나가는 글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사유를 밀어붙이고, 나중에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게 훌륭한 작가다. 사는 대로만 쓰려는 작가는 퇴행적으로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작가는 용기를 내는 작가다. 용기를 내어 아직 살고 있지 못한 삶에 대해서 과감하게 쓰려고 하는 작가. 그 글들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게 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또 그것을 쓰는 작가. 위대한 철학자들이 왜 그리 힘들게 살았는지 이제는 알겠다. 편하게 사는 만큼만 썼다면 그들은 그리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게다. (전통적 기독교) 신을 부정한 스피노자, 자본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한 칼 맑스, 언어의 남용을 문제 삼았던 비트겐슈타인, 서슬퍼런 나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발터 벤야민.
이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은 살아 온대로 쓰지 않았다. 아니 쓴대로 살아 낼 자신이 없었을 테다. 하지만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먼저 그것을 썼다. 그리고 쓴 대로 살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 삶의 무게가 사상가들을 고되게 했을 테다. 그래서 그들은 훌륭한 작가다. 이제껏 편안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긍정하느라, 새로운 그래서 때로 위험한 사유를 밀어붙이지도 쓰지도 못하는 작가는 그저 그런 작가로 남을 뿐이다. 그들은 편한 삶을 선택한 대가로 그저 그런 작가가 된 셈이다.
훌륭한 작가는 용기를 내어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글을 삶으로 감당해내는 사람이다. 역설적이게도 삶을 앞세우지 말고 때로 글을 앞세워야 한다. 훌륭한 작가 되고 싶다면, 때로 저질러야 한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렇게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 고되고 아픈 삶이 펼쳐질 것을 직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