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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눌러 '쓰다'

김훈의 '연필'과 나의 '기계식 키보드'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김훈     


 삶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속절없이 쏟아지는 삶을 그저 눌러쓸 수밖에 없다. 말장난을 좀 하자. 나도 삶을 눌러‘쓴다’. 삶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기에 나는 글을 눌러‘쓴다’. 멀쩡한 직장을 관두고 글쟁이로 나선지 4년이 넘었다. 세상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처음은 “글은 써서 뭐하게?”라고 물었고, 몇 권의 책을 낸 지금은 “글 쓰는 게 뭐가 그리 좋냐?”라고 묻는다. 질문은 변했지만 궁금한 건 하나다. “왜 글을 쓰느냐?”    



 한동안 그 질문에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을 하는 게 좋다”고 답했다. 틀린 답은 아니었지만 한 권, 한 권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나에게 다시 묻게 되었다. “정말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게 좋아서 쓰는 거야?” 이 질문은, 무언가 석연치 않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명쾌히 답할 수 없기에 묻어둘 수밖에 없는 그런 질문이었다. 소설가, 김훈의 짧은 글을 읽었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판을 치는 시대에, 김훈은 연필로 종이에 글 쓰는 몇 안 되는 진짜 아날로그 작가다. 그 이유에 대해, 김훈은 ‘연필로 쓰지 않으면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훈의 에세이 ‘자전거여행’의 부제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 이유도 그래서 일 게다. 김훈이 연필로 글을 써내려가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김훈도 삶을 눌러쓸 수밖에 없었기에 글을 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집필실에는 기계식 키보드가 하나 놓여있다. 얼핏 보면 알록달록한 불빛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으로 오해받곤 하는 그런 키보드다. 김훈이 연필로 꾹꾹 눌러쓴다면, 나는 키보드로 꾹꾹 눌러쓴다. 나는 쓰는 것이 좋다.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좋고, 꽤 괜찮은 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내게 ‘쓰다’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있다. 그건 바로 눌러 쓰는 맛이다. 나는 그 눌러 쓰는 맛이 좋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타자기의 촉감, 딸깍거리는 소리가 좋다. 그 촉감과 소리가 나의 글을 밀고 나가는 것 같아 더욱 좋다. 김훈이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자판을 누르는 다섯 개의 손가락 끝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쓰는 맛이 난다. 이제 소비욕이 거의 없지만 근사한 키보드만 보면 눈길을 빼앗기는 이유도, 혼자 카페에 앉아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이유도 알겠다. 나는 눌러 쓰는 것이 좋은 게다.



 알겠다. 내가 왜 눌러 쓰는 것이 좋은지. '딸각, 딸각' 눌러 써서 글을 밀고 나가는 것처럼, 내 고된 삶도 그렇게 밀고 나가고 싶은 것이다. 글쟁이로 산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생계의 어려움, 세상의 기묘한 시선, 가까운 사람과의 불화, 그로인한 외로움 등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렇게 눌려 씌여진 굴레 같은 삶을, 눌러 '써서' 밀고 나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막힘없이 타자를 쳐나갈 때 느껴지는 경쾌한 촉감과 소리처럼, 내 삶도 그렇게 밀고 나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버거운 삶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미친놈처럼 그리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겨 대었던 것이구나!' 이천의 어느 카페에서 오래된 타자기 앞에서 넋을 놓고 그것을 그리도 열심히 두들겼던, 삶을 눌러 쓰고 있었던 것이구나! ‘쓴다’는 건, 피할 수 없이 눌러 ‘써진’ 삶의 굴레를 나름의 방법으로 밀고 나가려고 눌러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삶을 밀고 나가기 위해 악착같이 눌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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