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철학적인 요소와 아무 관련이 없는 철학적인 개념은 없다." -질 들뢰즈.
삶의 심연까지 가닿을 수 있는 강밀한 사유. 철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그런 철학이 좋다. 동시에 그런 철학을 벗어나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 그래서 철학 이외의 수업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재미없으니까. 하지만 사는 것이 어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던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직장, 일, 돈에 대한 수업을 했다. 역시나 재미없었다. 직장은 이미 한 참을 지나온 이야기고, 일과 돈은 걱정의 대상일 뿐, 불안의 대상이 아닌지는 한참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적 주제라 할 만한 것들, 죽음, 삶, 사랑, 정치, 예술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다. 하지만 그날의 수업은 그런 철학적 주제들을 사치처럼 느끼는 분위기였다. 이해도 된다. 과거 한 때 내가 그랬으니까. 삶의 심연에 가닿기는커녕 삶의 표면에서 부유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으니까. 그때 나 역시 그랬다. ‘철학은 돈 못 버는 혹은 돈 많은 인간들이나 떠드는 것 아니야’
그 재미없는 수업을 끝내며 한 가지만은 재미 있었다.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철학을 벗어난 곳이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철학을 사치라 여기는 사람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내가 철학 안에 서 있어야 할 이유다. 철학 ‘밖’에 서 있기 위해 철학 ‘안’에 있기. 그것이 내가 철학을 하는 이유다.
삶의 심연에서, 삶의 표면에서 표류하는 이들을 초대하는 일. 삶의 피상을 넘어 삶의 본질로 초대하는 일. ‘일·돈·직장’의 표면적·피상적인 세계를 넘어, ‘죽음·삶·사랑·정치·예술’의 심연·본질의 세계로 초대하는 일. 그것이 내가 즐거운 철학 안에 있을 수 있는 대의다. 그 대의를 위해 하나의 즐거운 숙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언제나 세계와 세계를 가로지르며 횡단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경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