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 그것이 ‘선민의식’이다. 이것보다 꼴 보기 싫은 것도 없다. ‘내가 누군지 알아!’ ‘너희들은 내가 먹여 살리는 거야!’ 사회구조의 정점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이런 역겨운 선민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세속적 성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던 시절,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인간들을 종종 보았다. 글 쓰는 삶을 선택한 이후, 좋았던 것 중 하나가 선민의식을 가진 인간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글 쓰는 사람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 있어야 한다. 글 쓰는 삶을 살며 ‘아래’로, ‘아래’로 왔다. 그 곳에는 수면장애, 대인기피, 우울증, 공황장애, 거식증, 자기학대,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부모의 학대와 자살을 경험했고, 이혼과 성추행, 성폭행을 경험한 이들도 있었다. 그네들은 그 깊은 상처로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었다. 당황스럽게도, 나는 아래서도 선민의식을 마주하게 되었다. 뒤집힌 선민의식.
깊은 상처를 가진 혹은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진 선민의식이 있다. 선민의식은 선택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이다. 의아하다. 상처를 가진 혹은 가졌다고 믿는 이들에게 어떤 우월감이 있단 말인가? 그들 역시 기묘한 우월감을 갖고 있다. 자신이 불행으로부터 선택되었다고 믿기에 가지게 되는 우월감. ‘나의 불행은 특별한 거야.’ ‘너희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라는 우월감을 가진 이들이 있다. 이것 역시 선민의식이다. 뒤집힌 선민의식.
‘보통의 선민의식’은 기쁨의 우월감이고, ‘뒤집힌 선민의식’은 슬픔의 우월감이다. 전자의 선민의식은 오만함과 자만심이라는 기쁨의 우월감을 갖게 하고, 후자의 선민의식은 위축감과 자기비하라는 슬픔의 우월감을 갖게 한다. 그래서 '뒤집힌' 선민의식이다. 기쁨의 우월감이 아니라 슬픔의 우월감인 까닭에. 하지만 두 선민의식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둘 모두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니까. 결국 자신이 (행복 혹은 불행에)선택되었기에 특별하다고 믿는 내적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어떤 선민의식이든, 그것은 건강한 삶을 파괴한다.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선민의식이 사회로부터 격리 당한다면, 뒤집힌 선민의식은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격리한다. 뒤집힌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은 심연의 불안, 공허, 허무에 시달리게 된다. “너희들이 내 상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그 슬픔의 우월감은 어둡고 축축한 심연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이보다 더 서러운 일도 없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과거에 묶여 깊은 심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가졌지만 건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을 알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선민의식을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으로 뛰어 들어 득실거리는 타자들과 부대꼈기에 심연의 불안, 공허, 허무로부터 벗어났다. 그들은 그렇게 씩씩하고 건강해졌던 게다. 자신이 불행으로부터 선택되었다고 믿는 있는 이들은 아프게 돌아볼 일이다. 그것은 슬픔의 선민의식이 아니었는지를.
기쁨의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 사회로부터 격리해야할까?'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뒤집힌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은 늘 눈에 밟힌다. 불행으로부터 선택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슬픈 우월감. 그 서러운 삶은 항상 나를 아프게 한다. 그래서 슬픈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의 날카로운 말들에 상처받을지라도, 그들에게 기꺼이 다가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