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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예민함과 섬세함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힘들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밥도 잘 못 먹고, 어떤 맛의 음식은 먹을 수 없고, 특정한 재질의 옷은 입을 수 없고, 이상한 냄새가 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예민한 사람들은 소리, 미각, 촉감, 냄새에 크게 반응한다. 그래서 삶이 고달프다. 더욱 큰 문제는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중으로 고달프다. 짜증나는 소리, 맛, 촉감, 냄새 때문에 고달프고, 그런 예민한 자신이 싫어서 또 고달프다. 예민함 때문에 삶이 고달픈 이들은 어찌 해야 할까?


     

1. 예민함과 섬세함     


우선, 예민함과 섬세함을 구분해야 한다. 둘 다 ‘민감하게 반응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예민함과 섬세함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자신)이 민감하게 반응할 때는 ‘예민하다’고 핀잔을 주고(자기비하), 좋아하는 사람(자신)이 민감하게 반응할 때는 ‘섬세하다’고 칭찬을 한다(과대평가). 예민함을 고민하는 이들은 가장 먼저, 예민함과 섬세함은 어떻게 다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민함은 슬픔의 정서고, 섬세함은 기쁨은 정서다. 예민함은 외부(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고, 섬세함은 내부(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민함은 슬픔의 정서고, 섬세함은 기쁨의 정서인 것이다. 예민함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타자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서이기 때문에 슬픔(짜증, 분노)을 준다. 섬세함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게 하는 정서이기 때문에 기쁨(환희, 경탄)을 준다.        


 취향이 아닌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예민한 사람들은 그 외부 자극(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외부 자극보다 그 외부 자극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민한 사람이 그 음악(소리)에 짜증이 나는 이유는 그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섬세한 사람은 그 음악에도 짜증이 덜 나거나 안 난다. 그 외부자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외부자극이 자신의 내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이다. 민감함과 섬세함의 차이는 “아, 뭔 음악이 이딴 식이야!”와 “아, 이 음악은 나에게 안 맞구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예민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행복이 무엇인가? 슬픔으로부터 멀어지고 기쁨에 다가서는 것 아닌가. 그러니 예민함은 극복의 대상이다. 예민한 이들이 예민함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이 한 사람의 특질(성향, 기질)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예민한 이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즉, 자신이 ‘예민한 이유’가 자신이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예민한 이들이 예민함에서 벗어나지 못하 근본적인 이유다.   

    

 예민함은 어떤 사람의 특질(성향, 기질)이라기보다, 어떤 상황의 특질이다. 나는 전혀 예민하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잘 만지고, 잘 듣고, 잘 읽고, 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래 예민하지 않게 생겨 먹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도 예민해질 때가 있다. 어떤 고민이나 걱정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거나 혼란해질 때 그렇다. 


 그때는 나 역시 작은 외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게 된다. 음식이 조금만 짜도 식탁을 들어 엎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난다. 책을 읽는데 옆에서 작은 소리를 내면 '닥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다. 이상한 향수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면 줘 패버리고 싶다. 지하철에서 누가 살짝 내 몸에 닿으면 그 순간 그의 팔을 잡아 채 업어치기 해버리고 싶다.     

 

 예민함은 상황의 특질이다. 어떤 상황일까?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한 상황. 자신이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상황.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때 모든 사람은 예민하다. 예민함 때문에 삶이 고달프다면,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자신의 예민함이 아니다. 예민함, 그것은 한 사람의 고정불변의 특질이 아니다.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특질일 뿐인 까닭이다.     


 평생을 예민함으로 고통 받은 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나는 원래 예민한 사람이니까’로 규정한다. 그 허황된 규정을 이해한다. 그 긴시간 예민함으로 고통 받았던 진짜 이유에 직면하는 일은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을 예민함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아픈 일이다. 나의 불행이 ‘내 선택’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너무 아프지 않은가. 그래서 유약한 존재들은 그리도 나의 불행을 ‘내 운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예민한 이들에게 바란다. 너무 늦지 않게 나의 불행이 나의 선택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예민했던 건, 내가 주인으로 사는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강건한 깨달음이 너무 늦지 않게 예민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테다. 그때 ‘섬세하지만 예민하지 않은’ 그래서  ‘기쁨에 가까워지고 슬픔으로부터 멀어진’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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