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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조금 덜 오래된 미래, ‘LETS’

'조금 덜 오래된 미래'에 관하여

‘오래된 미래’는 가능한가?

혹자들은 지금의 병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면서 대안으로 ‘오래된 미래’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이 ‘오래된 미래’라는 것은 과거 인디언 사회를 언급 하면서 자본주의 이전의 공동체 사회로 복귀하자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 자연과 함께 살았던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강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생활을 했었던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삶을 황폐하게 하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는 어디에도 설자리가 없을 테니까.


 ‘오래된 미래’에 대해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 역시 떨칠 수가 없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에 적응할 만큼 적응한 사람들이다. ‘오래된 미래’에 대한 논의에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동시에 현실성은 조금 떨어진다고 보는 편이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이 바로 분업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적응한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일을 직접 하지 않는다. 밥을 먹기 위해 농사를 짓지 않고, 생선을 먹기 위해 낚시를 하지도 않고, 매일 운전을 하지만 자동차를 만들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분업체계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다. 자본주의, 그러니까 이 분업체계를 받아들였던 댓가로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오래 전에 잃었다. 지금의 이런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오래된 미래’는 정말 가능하기는 하는 걸까? 자본주의적 분업에 적응할 대로 적응한 사람 중 ‘오래된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소수일 게다.


 화폐없이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조금 덜 오래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서 너무 오래된 미래 말고, 조금 덜 오래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우선 자본주의라는 미친 열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확히는 화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지금처럼 모든 생활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화폐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결코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싶다면 ‘화폐 없이 살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결코 우회할 수 없다.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보자. 만약 화폐 없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식당에서 음식과 돈을 교환하지 않아도 되고, 영화관에서 티켓과 돈을 교환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그 긴 시간 짜증나는 인간들과 함께 하지 않아도 될 게다. 화폐 없이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조금 더 많은 여가시간이 주어질 것이고 조금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원했던 것은 여가 시간과 자유였지 돈이나 화폐 그 자체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새로운 대안, ‘LETS’는 무엇일까?

여기서 발칙한 상상의 수위를 조금 더 높여보자. 국가나 정부가 인정하는 기존의 화폐가 아니라 작은 공동체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대안으로 ‘LETS’를 이야기하고 싶다. LETS는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의 줄임말로 지역 경제 화폐를 의미한다. LETS를 간단히 정의 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존의 중앙화폐(현금, 신용카드)를 매개로 하지 않고 특정 지역 내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교환함으로써 돈 없이도 일정 수준의 소비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경제 시스템이다. 말하자면 특정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가상 화폐’를 사용하여 구성원들 간에 돈 없이 서비스나 물품을 교환하는 것이다.     


 이 LETS에 대해서 일본의 탁월한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저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LEST는 참가자가 자기 계좌를 갖고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목록에 올려 자발적으로 교환하며, 그 결과가 계좌에 기록되는 다각 결제 시스템이다. LETS의 통화는 중앙은행에서 발권되는 현금과 달리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그때마다 새롭게 발행하도록 되어 있다. (중략) LETS에서는 각자가 (단지 계좌에 기록할 뿐이지만) 통화를 발행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 주권의 하나가 화폐 발행권에 있다고 한다면, LETS는 말뿐인 인민 주권이 아니라 각자를 진정한 주권자이도록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의해서 길러진 우리에게 이 LETS는 여전히 생경한 개념일 수 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진규, 성찬, 유나 이 세 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진규는 볶음밥을 만들 수 있고, DVD를 가지고 있다. 성찬은 컴퓨터를 고칠 수 있고, 책을 가지고 있다. 유나는 아이를 가르칠 수 있고, 옷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자신만의 계좌 목록에 올려놓는다.

 

 진규는 아이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유나에게 아이의 교육을 부탁한다. 그리고 유나는 진규가 제공하는 쿠폰 형식의 통화를 받는다. 가상의 돈이 생긴 것이다. 유나는 당장 받고 싶은 서비스가 없지만 상관없다. 그 가상의 화폐 역시 지금 우리가 가진 화폐처럼 썩거나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유나가 책을 읽고 싶다면 이제 그 가상의 화폐를 성찬이게 지급하고 그의 책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리고 성찬이는 그 가상의 돈을 이용해 다시 진규의 DVD를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LETS는 이런 식으로 기존의 화폐 없이도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조금 덜 오래된 미래, ‘LETS’

안다. 앞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 현실에서 적용은 어려울 것 같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는 거. 하지만 앞서 내가 LETS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덜 오래된 미래’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이런 지역 경제 화폐의 개념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1980년대에 이미 현실화된 적이 있다.


 1980년대 초 경기침체와 고실업에 시달리던 캐나다의 작은 마을 커트니(Courteney)는 불황과 실업으로 인한 궁핍에 시달렸다. 당시 영국에서 이민 온 ‘마이클 린튼’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금 없이 물건과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 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지역화폐 거래관리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회원으로 가입한 지역주민들이 이를 이용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서로 교환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지역경제화폐 제도는 90년대 본격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 호주, 미국 등지에서 'LETS', '녹색달러', '이타카 지역화폐', '페이퍼', '타임달러' 등의 여러 가지 얼굴로 퍼져나갔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앞서 말한 가라타니 고진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 LETS라는 개념을 적용한 새로운 대안 공동체를 운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진이 이끌었던 NAM(새로운 연합주의 운동, New Associationist Movement)이라는 대안 공동체가 실제로 운영되었던 적이 있다. 아쉽게도 NAM운동은 현재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일부 철학자들은 고진의 실험이 멈춘 것은 그의 이론이 틀려서라기보다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절박한 실천의지 때문일 거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 LETS는 상당히 현실적인 대안이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철저한 분업화에 적응한 우리로서 ‘오래된 미래’로 복귀하는 것은 너무 멀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LETS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현가능성이 높다. 분업화라는 현실적 조건 바탕 하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 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LETS야 말로 큰 거부감 없이 일상을 혁명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이 LETS라는 것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지는 우리 선조들의 삶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로 두레나 품앗이 같은 선조들의 지혜로운 전통은 LETS의 개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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