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나무> 보충수업

'깨우침' 없이 '깨달음'은 불가하다!

1940년대의 미국 생물학자 로저 스페리는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그 실험은 다음과 같다. 개구리의 한 쪽 눈을 빼내어 시신경을 절단하고 눈을 180도 회전시킨 다음 다시 집어넣는다. 이 개구리 앞에 먹이를 놓았을 때 개구리는 외부의 먹이를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있지만 혀를 180도 반대 방향으로 뻗는다. 스페리는 개구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일의 실패를 거듭하다보면 학습을 통해 행동을 교정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끝내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뚜라나는 스페리의 이 실험을 재해석했다. 스페리의 예상이 빗나간 이유에 대해 실험의 가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도롱뇽(개구리)이 외부세계의 벌레를 자신의 혀로 겨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마투라나 ) 즉, 개구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 개구리에게는 진실인 단독적(주관적) 세계 그 자체다. 그 개구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찰자(스페리)의 단독적(주관적)인 실재일 뿐이다.


그 개구리는 결국 먹이를 먹지 못하게 굶어 죽게 된다. 이는 그 개구리가 자신만의 단독적인 세계 속에서 살았기에, 자신의 행동을 교정할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하게 되었음을 반증한다. 신경계는 물리적으로는 외부를 향해 분명 열려 있다.(시신경-먹이) 하지만 신경계 작용의 결과, 즉 인식작용은 내부를 향해 닫혀 있다. (단독적이며 주관적인 자신만의 세계)


마투라나의 이런 진단은 우리에게 우울과 절망을 준다. 우리 역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먹이를 먹지 못하고 죽어갈 자신을 얼핏 보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마투라나는 ‘이중보기’라는 개념을 말한다. “관찰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이중보기의 결과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이중보기는 시선의 확장(객관화)이다. ‘나’의 시선으로 ‘파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시선으로 ‘개구리’가 ‘파리’를 보고 있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이중보기다. 그러니 관찰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중보기의 결과인 셈이다. 관찰은 이미 그 자체가 제 3의 시선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개구리가 파리를 먹지 못하고 죽어간 것은 이중보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중보기가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한가? 달리 말해, 개구리와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언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이중보기를 한다. 내가 파리를 직접 보고 있을 때는 '이중보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날 밤에 “나는 파리를 잡았다”라고 일기(언어)를 쓸 때 이중보기 가능하다. 언어를 통해, '나'를 벗어난 제 3의 시선으로 ‘나’와 ‘파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언어는 만능 열쇠가 아니다. 언어는 이중보기를 가능하게 해주지만 언어는 다시를 우리를 가둔다. 삶의 진실은 언어화될 수 없으며, 우리는 언어를 통해 언어만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언어는 분명 감옥이다. 그것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 감옥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열쇠다. 신경계 작용(인지작용)의 폐쇄성을 열어젖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가 바로 언어에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우리가 많은 공부(언어)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언어)를 통해, 나의 단독적 세계 너머 타자의 단독적 세계를 희미하게 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 不立文字'(문자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의 종착지일 뿐, 결코 과정이 아니다. 그 과정은 언제나 '문자'일 수밖에 없다. 언어라는 감옥에서 태어난 우리는 언어 그 자체를 열쇠삼을 수밖에 없다. ‘지눌’의 사자후를 다시 새길 시간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因地而倒者 因地而起”


누군가 '불립문자'를 떠든다면, 나는 답해주겠다. "깨우침 없이 깨달음은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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