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엄마', 8월의'엄마' 그 사이의 아버지
by 황진규의 철학흥신소 May 11. 2020
지혜로움, 그것은 감정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황진규
‘나이 40 이후에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데에 시간을 쓴다던데…’
어젯 밤에 영화 '아이리쉬맨'을 보았다. 러닝타임이 209분(3시간 29분)에 이르는 긴 영화. 영화가 끝나고 새벽이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울음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줄곧 영광, 명예, 환희란 감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최선을 다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삶의 끄트머리즈음, 조금은 찝찝한 과거의 발자취들을 회고하며 하는 말이다. 이런 회고는 비겁하고 더러운 합리화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결국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꼬리를 물고 온갖 자문이 이어졌다. 자답까지는 이어지지 못한 채 잠이든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프랭크'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딸 '페기'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아버지와 그를 인정할 수 없는 자식들. 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이어진 경멸까지.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반짝이는 순간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그리고 남겨진 추한 흔적들을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니 참, 삶이란 늙음 앞에서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게한다. 너무 무서운 영화가 아닌가?
사람들의 행동에는 그들의 삶의 맥락이 함께하고 있다. 내 세상 속에서 가장 맞는 결정을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나이 40 이후에는 지금까지의 삶을 정당화하는데에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이 말이 늘 무서웠다. 나 또한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게될까봐. 그리고 누군가에게, 혹시라도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경멸하게되는 경험을 하게될까봐.
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모든 결론이 ‘사랑’, 그리고 그 감정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도 이런이유일 것이다. ‘멍청아, 부도 권력도 명예도 아무것도 아니야.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확장해야지. 너의 사랑을 나누어야지. 그것이면 돼!’ 자신의 찬란했던 젊은 날을 덤덤히 회상하며, 신부에게 무용담을 늘어놓는 그는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래도 후회가 되시죠? 그렇게 살았다는 것에…” 이 때, “음...뭐…”하는 프랭크의 어리둥절한 반응에서 실소가 터졌다.
나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안다. ‘그래. 그래야지. 그에게 후회하는 삶이란 말이 안되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후회라는 걸 한단 말인가? 본인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왔는데 죽음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 수십년의 삶을 한꺼번에 부정하라고? 지금와서 깨뜨리라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영화의 끝에서 그가 과거의 삶을 후회하고 눈물지었다면 나는 아마 그 209분의 영화의 지나친 '영화화'에 허탈했을 것이다.
My way를 부르는 중년 남성
많은 종류의 미움의 감정을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극복못하는 종류의 싫음이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고 했다. 기쁨, 슬픔, 욕망. 그리고 그 슬픔에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감정의 오묘한 결의 차이에 따라 증오, 분노, 경멸, 조롱, 공포, 복수심, 멸시 등으로 나뉜다. 여기서 내가 극복하지 못한 감정은 ‘경멸’이다. 정확한 정의는 이렇다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의 안에 있는 것보다 그 사물 안에 없는 것을 더 많이 표상하도록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감동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의 표상."
그 사람을 떠올리면 그에게 없는 것만 (예를들어 사랑, 인간애, 생명에 대한 존중과 같은 감정이 빠진 사람에게의 경멸감이 숨겨지지 않는다.) 표상하게 되어 진절머리나게 싫어지는 그런 것. 예전 감정쓰기 훈련을 할 때, 그 감정의 원천을 찾아보는 경험을 했는데, 그 기저에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타인의 시선, 사회적 기대안에서 꾹꾹 눌러왔을 뿐.무려 그렇게 완성형이 되어버린 중년의 기득권의 모습을 볼때 뿐 아니라, 그렇게 자라고 있는 내 또래의 잠재적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는것 조차 내 안의 경멸감이 자라나는 것이 느껴진다. 고문과도 같다.
5년 전인가. 아버지가 책을 내게 되면서 큰 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다. 국회의원, 어딘가의 협회의장, 각종 교수들까지. 사회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고, 그들의 축사도 이어졌으며, 책의 구절을 읽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아버지의 특기를 살려 가곡도 몇 곡 부르며 나름 화려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먼저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먹이는 연출 또한 빠지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장면을 안타까워했다.
다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순간이 엄청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웃지 못했던 사람은 아마도 나와 내동생 정도였을 것이다. 아이리쉬맨에서 무척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저명한 인사들이 잔뜩 참석한 프랭크의 파티.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러운 프랭크와 그런 아버지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표정의 자식들.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불렀던. My way. 엘비스프레슬리 원곡인 My way라는 노래는 우습게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노래이다. 젊었던 청춘을 아련히 어루만지며 조용히 읖조리면서 시작하다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애틋한 나머지 기어이 그 감정을 터뜨리며 did it my~~~~~ way~~~ 하며 소리치는 구간까지. 완벽하게 가관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사실 나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자 애창곡인데,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아버지 뿐이랴. 그렇게 본인의 삶을 애틋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쩌겠나. 나는 아버지를 경멸해서 뭐 어쩌자는 것일까? 글을 쓰고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그의 삶을 정당화하고 잘 살아왔다 느끼는게 너는 무엇이 그렇게 불편한가? 그를 함부로 연민하지도, 비난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보기에 괴물같은 삶이라도 그 삶을 그렇게 정당화하건 그건 그 사람의 몫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가? 정말 그런건가?
비난이나 질책, 어설픈 충고, 후회를 종용하는 듯한 말은 그 사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쯤은 이제 알고있다. 결국 온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세계에 끌어다 반면교사삼아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 연휴 때 동생이 하는 캠핑장에 5일 동안 쉬러 갔다. 밤이 되면 캠핑 의자를 끌고나와 가운데 장작을 태우며, 오래도록 동생과 수다를 떨었다.
같은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엄마에 대한 깊은 아픔을 한켠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또 다른 나. 그 누구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 또한 아마도 같을 것이기에 서로를 토닥일 수 밖에 없는 나의 혈육. 내가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게 되면서, 대부분의 아버지의 심술, 비난, 비아냥, 못된 결심,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동생이 받고있다. 동생이 받는 유일한 스트레스라는 아버지의 심술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숙제이다.
아이리쉬맨 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는 저런 늙음을 경험하지 않겠다 다시한번 견고히 결심했다. 나는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이며, 나와 내 가족 삶 만큼이나 다른 존재 또한 애틋하게 여길 수 있는 삶을 살리라. 영화를 보고 역시 '아버지의 삶은 사실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부로 틀렸음을 얘기할 수는 없다고 동시에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해한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애초에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생각이겠지만, 내가 느끼는 이유 있는 경멸의 감정 또한 무시할 생각은 없다. 남은 것은 이 감정을 여실하게 느끼게 한 대상. 나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다. 프랭크 역을 연기한 로버트드니로와 한살차이나는 나의 아버지. 그렇게 나이든 아버지를 나는 함부로 연민하며, 마음이 아파지는 것.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 이렇게 나 또한 ‘어쩔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박효웅
- 철학흥신소 비밀 요원.
- 어린 시절 꿈이 월급쟁이임.
- 몇 번의 이직과 퇴사, 그리고 자유를 만끽했음
- 지금 다시 집에 갇혔음('오늘의 집')
- (오늘의) 집에 갇혀서 엄마-되기 중
- 그림을 그리며 영상을 만들고 있음
- 악플은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