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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위의 질주(Running On Empty,1988)

허공 위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 시드니 루멧

시드니 루멧(1924~2011) : 미국의 영화감독. 루멧은 유대인으로 뉴욕에서 자란 미국의 감독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흥미만을 쫓는 헐리웃 스타일의 감독은 아니었다. 우디 앨런과 친했던 루멧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앨런의 영화 속 세계관을 좋아한다. 그리고 뉴욕이 가진 수많은 면들, 이를테면 범죄와 예술, 지적 교양과 부패, 아름다움과 추함.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영감이 된다. 이 도시가 리얼리티로 가득하다면, 할리우드는 그저 판타지로 충만한 곳이다.”

 루멧은 미국의 영화감독이지만, 정확히 말해 ‘헐리웃’이 아닌 ‘뉴욕’의 감독이라 정의하는 편이 좋겠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재미’와 ‘의미’를 모두 느낄 수 있는 것도 그래서 일 테다. ‘헐리웃’이 ‘자본’(재미)뿐인 세계를 상징한다면, ‘뉴욕’은 루멧의 말처럼, 자본으로 인한 범죄, 부패, 추함뿐만 아니라 예술, 지적 교양,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의미’의 세계를 상징하니까 말이다. 영화가 ‘자본(재미)’만을 다룰 때 천박해지지만, ‘자본(재미)’마저 다룬다면 그것은 곧 인문주의가 된다. 그의 1957년 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멧의 인문주의적 감성은 그의 작업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배우들을 섭외하는 과정에 특히 그렇다. 루멧은 배우들 사이에서 ‘배우들의 감독an actor's director’으로 불렸다. 여느 감독들은 작품의 배역에 무난한 배우들을 섭외했지만 루멧은 그러지 않았다. 액션 배우로 특화된 '빈 디젤'을 법정물인 「Find Me Guilty」(2006)에 주연으로 세워서 디젤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했고, 섹시스타의 상징이던 '샤론 스톤'을 「글로리아」(1999)에 주연으로 출연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처럼 루멧은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사람(배우)과 작품 모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우디 앨런’과 함께 ‘시드니 루멧’을 자본의 심장(미국)에서 자란 인문주의의 가능성(뉴욕)이라고 말하고 싶다.           




‘혁명’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1.

 “왜 철학적으로 살지 않는 거야?” 아내와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항상 돈을 벌고 쓰는 생각뿐이고, 매일 학원을 몇 군데씩이나 보내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수업을 하는 그 모든 일상을 혁명의 투사처럼 살았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 철학적으로 살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부조리이며 비겁함이었으니까. (집) 밖에서는  온갖 사회적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해서 목청을 높여 싸우면서 (집)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내게 참을 수 없는 부조리이며 비겁함이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이들 앞에서는 한 없이 날카롭게 비판적이면서 자신과 가까운 이들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게 이해하는 삶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이 혁명의 길이라 믿었다.


 ‘아더’를 욕하지 말라! ‘아더’처럼 살아본 적이 있는가? 베트남 반전 시위를 하고, 베트남에 네이팜탄이 투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 실험실을 파괴할 수 있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헌신할 수 있는가? 늘 도망 다녀 하는 삶을 살고 6개월 마다 한 번씩 이름을 바꿔야 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의 삶까지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니지” 자식을 낳아본 적 있는가? 아이가 무난하고 편안한 길로 가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 자신의 고통당하더라도 자식만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이것이 혁명가라고 자처했던 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너무 쉽게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이유 아니던가?


 나는 ‘아더’였다. 그래서 ‘아더’의 마음을 안다. ‘아더’는 매일 싸운다. 세상(대의)이냐? 자식(이기심)이냐? 세상을 바꾸려면 자식의 편한 삶은 없고, 자식을 편하게 살게 하려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아더’는 그 힘든 싸움을 매일 이어가며 겨우 겨우 혁명의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철학’을 하면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면 ‘철학’을 할 수 없다. ‘철학’을 업으로 삼은 후부터 그 힘든 싸움을 하며 겨우겨우 철학자의 마음을 유지하며 살았다. 나도 ‘아더’도, 왜 혁명이나 철학 같은 것은 다 집어던지고 아이들과 파티를 하며 살고 싶지 않겠는가? ‘대니’를 야박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하는 ‘아더’의 마음도, 작은 생일 파티에 환한 미소로 춤을 추던 ‘아더’의 마음도 나는 알고 있다.     

 


2.

 ‘아더’와 ‘애니’의 혁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싫으면 왜 하는데?” “야구는 내 인생이야.” ‘대니’는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다. 의아한 친구는 시합을 즐기지 않을 거면 왜 야구를 하냐고 묻는다. 야구는 내 인생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것이 ‘아더’와 ‘애니’의 혁명이 이른 곳이다. 가장 중요한 일(야구)을 위해 욕망(시합)은 억눌러야 한다는 것. 이는 혁명(가장 중요한 일)을 위해 가족(욕망)을 희생해야 한다는 기성 혁명 논리의 답습이다. ‘아더’와 ‘애니’의 자식인 ‘대니’가 그들의 혁명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더’의 혁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욕망을 억압하는 혁명, 욕망을 억압해야만 하는 혁명은 어디로 가는가? 조금씩 경직되어 결국 자기 파괴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온 ‘아더’의 술주정은 그런 경직성과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욕망을 억압한 혁명은 끝은 언제나 그렇다. ‘대니’는 그런 ‘아더’의 혁명의 논리를 충실히 물려받았다. ‘대니’의 혁명은 ‘아더’의 혁명을 답습하게 될까? 인생이 늘 그렇듯 작은 마주침이 모든 것을 바꾸게 된다. ‘대니’에게는 ‘아더’에게는 없는 마주침이 있다.


 ‘애니’와 ‘음악’, 그리고 ‘로나’다. ‘대니’는 FBI에게 쫒겨 도망가야 하는 다급상황에서 피아노 건반부터 챙길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다. 이는 ‘애니’가 어린 시절부터 ‘대니’에게 음악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 덕분에 ‘로나’ 역시 만나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대니’는 또한 ‘아더’의 갈림길에 다시 섰다. ‘혁명’과 ‘욕망’ 사이의 갈림길. ‘아더’는 ‘혁명’과 ‘욕망 사이에서 ‘혁명’을 선택했다. ‘대니’ 역시 ‘혁명’과 ‘욕망’ 사이에 섰다. ‘대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걸 너한테 이야기하면 너와 우리 가족이 위험해지니까 미안해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야. 널 사랑해. 사랑해.” ‘대니’는 ‘로나’에게 자신 가족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제 ‘대니’는 아버지와 다른 길로 갈 수 있을까? 이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대니’에게 혁명은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부모이며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음악’과 ‘로나’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자신의 부모이자 세계인 혁명을 포기할 순 없다. ‘대니’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뿐이다. 황급히 다시 떠나야 하는 ‘대니’는 ‘로나’에게 작별키스를 하고 다시 부모, 아니 혁명가들에게 달려간다.


 “줄리아드 음대에 들어가” ‘아더’와 ‘애니’는 황급히 돌아온 ‘대니’에게 혁명을 멈추고 ‘욕망’을 쫓아가라고 말해준다. ‘아더’와 ‘애니’는 변절했는가? 그들은 긴 시간 지켜온 자신의 ‘혁명’을 부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니’를 떠나보내며 ‘아더’와 ‘애니’는 비로소 진정한 혁명가가 된다. 자신의 혁명 시절과 다음 시대의 혁명을 아름답게 이은 진정한 혁명가. ‘아더’와 ‘애니’는 자신의 혁명의 시절에 찬란하게 빛났으며, 그 찬란한 시절이 지나 아프게 다음 세대의 혁명가를 잉태했다. 난해하게만 들렸던 들뢰즈의 혁명의 논리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3.

몇몇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혁명적인 것은 욕망이지 축제가 아니다또한 어떤 사회라도 참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착취예속위계의 구조는 반드시 위태로워진다안티오이티푸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혁명적인 것”은 ‘대의’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지만 그 “참된 욕망”은 “축제”가 아니다. ‘대니’에게 ‘음악’과 ‘로나’는 “축제”인가? 아니다. “혁명”은 흥청망청 놀고 마시는 “축제”가 아니다. “욕망”이다. 그것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간절한 “욕망” 그것이 아니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갈 힘이 없는 간절한 “욕망” ‘대니’에게 ‘음악’과 ‘로나’는 그런 “참된 욕망”의 대상이다. 그 “참된 욕망” 속으로 들어갈 때,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를 양산하는 “착취, 예속, 위계의 구조는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아더’와 ‘애니’가 그토록 바랐던 일, 바로 혁명 아닌가? 

     

 혁명은 언제 완성되는가? 고집스러운 자신의 혁명의 논리를 내려놓을 때이다. 그 유연함으로 다음 혁명의 논리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이것이 혁명의 완성이다. 혁명의 완성은 혁명의 미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아더’와 ‘애니’는 자신들의 미완의 혁명을 받아들임으로서 ‘대니’의 혁명의 시절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혁명은 미완인 채로 완성된다. ‘아더’와 ‘애니’가 ‘폭탄’으로 세상을 바꾸었다면, 이제 ‘대니’가 ‘로나’와 함께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차례다. 

     

 다시 묻자. 혁명은 언제 완성되는가? 사랑할 때다. 언제 자신의 고집스러운 혁명의 논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사랑할 때다. “참된 욕망”은 언제나 사랑이다. ‘아더’와 ‘애니’는 진정한 혁명가다. 그들은 ‘세상’을 뜨겁게 사랑했던 만큼, ‘대니’ 역시 사랑했다. 그 사랑으로 혁명을 완성했다. 미완인 채로 아니 미완임을 인정했기에 완성된 혁명. 그렇게 혁명은 미완이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대니’의 사랑이 다시 세상을 바꿀 테니까 말이다. 

       

 “자, 이제 가서 세상을 바꿔봐. 네 엄마랑 나는 노력했다.” ‘대니’를 떠나보내며 했던 ‘아더’의 말을 마음에 담는다. 나 역시 나의 혁명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 사랑했던 선배들의 혁명의 논리를 이어받아 나의 혁명의 논리를 고집스럽게 지켜가고 있다. 경직된 혁명의 투사처럼, 때로 고집이 지나쳐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며 살았다. 상처 줬던 이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시작된 혁명이었으니, 그 끝도 사랑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때가 되어, 나의 혁명의 시절이 다 지났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 역시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 이제 가서 세상을 바꿔봐. 나는 노력했다.” 그런 ‘철학자’, 그런 ‘혁명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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