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경 Oct 29. 2019

무인도에 꼭 3가지만 가져가야 하는 이유

배필 찾는 법

나는 타고나기를, 거기에 직업병까지 더해 게임과 퀴즈를 참 좋아한다.


소싯적 술자리에서도 내 주사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는

"게임하자!"였다.


경주에 놀러 가서도 친구들이 효도 선물로 효자손을 살 때 나는 선조들이 포석정에서 가지고 놀았다는 술자리용 주사위를 사며 이것이야 말로 고전 중에 고전, 클래식 중에 클래식이라며 귀히 모셔 온 기억이 있다.


이렇듯 게임 마니아인 내가 게임 말미에 즐겨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무인도에 간다면 꼭 챙겨갈 세 가지는?"


물론 질문은 상황에 맞춰 조금씩 수정된다.


예를 들면

'무인도에 갈 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것 중 훔쳐 가고 싶은 세 가지는?' 이라던지 혹시 뒷담화 용이라면 '(싫은 사람 나열 후)이 중에서 딱 3명을 데려가야 한다면 누구?'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요리조리 응용까지 가능한 이 무인도 질문을 할 때면 언제나 궁금했다.

'이 어마어마한 질문은 과연 누가 맨 처음에 만들었을까?'  

<영국에서 시작된 행운의 편지>와 쌍벽으로 그 창시자의 신상이 정말 궁금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오래도록 구전되고 있는 점도 대단하거니와 이 질문은 마치 재미에 의미까지 더해진 예능프로그램처럼 '소재미'와 함께 '상대에 대해 새롭게 느끼는 바'까지 얻을 수 있는 플러스알파가 있기 때문이다.


'앗! 저런 걸 가져간다고? 의왼데...'

'저런 게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잠시 전혀 다른 얘기로 넘어가 볼까 한다.

내 연애관 이야기이다.


나는 30대를 맞이하고, 초반, 중반으로 넘어가는 그 길에서 연애관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30대 초반에는 20대의 몰입도 높은 연애 따윈 집어치우고 하루살이처럼 내일이면 없어져도 괜찮을 깃털 연애를 꿈꿨다. 최대한 많이, 멋진 이들과 그저 썸만 탄고 싶은 열망.

그리하여 클럽 여신이었던 친구 꽁무니를 쫓아다니기도 했고, 일로 스치는 사람들을 만나도 나 혼자 괜히 저울질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다 부질 없구나... 시답잖은 짓으로 귀한 에너지 그만 낭비하자 싶은 날이 왔다.


그러던 동안은 철저하게 귀차니스트 모드로 돌변하여, 주말이면 침대 정중앙부터 네 모서리까지 골고루 굴러다니면서 혼자만의 방구석 여행을 떠났다. 그때 내 베스트 프렌드는 무한도전.

너무 누워있어 목주름이 생길 수 있다며 침대 밖으로 목을 쭉 늘어뜨린 채 뻘게진 얼굴로 무한도전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며 남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당시 20대의 내 동생은 진심으로 내 앞날을 걱정하곤 했다.

근데 소름 끼치는 건 30대로 진입한 지금의 내 동생이 주말마다 나의 그때처럼 혼자 떠나는 방구석 여행 마니아가 되었다는 풍문이다.   


여하튼 침대에 누운 채 내 연애에 대해 따지고 생각해봤다.

이렇게 연애관이 극과 극을 오가는 이유가 뭘까?

급기야 이렇게 만사 귀찮아져 버린 이유는 뭘까?


답은 하나.

괜찮은 사람이 고갈되었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썸도 상대가 받아줘야 되는 것이지만은! 그전에 타고 싶은 존재가 있어야 되는데 이건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이리저리 재는 것만 많아지고... 썸 스타트를 끊기가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괜찮은 놈은 다 임자 있다"

이 건 정말 진리 이기 때문에 속담으로 등재해야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 없기도 했거니와 일단 어렵게 누굴 만나도 '가볍게 만나 보자'했으면서 어느새 평생 배필이라도 되는 냥 툭툭 튀어나오는 별거 아닌 단점에도 실망하고 관계를 청산했다.

'남편감을 찾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어느 정도는....' 이런 마음에서였다.


이제야 돌아보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그때 나는 연애 시한부 인생이었다.

20대를 넘기고 앞자리에 3을 달고 보니 희미하게만 보이던 결혼 적령기라는 게 실루엣을 드러내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어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이 짧은 시간 누리고도 싶고,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는 배필도 찾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나는 책상에 앉아, 나의 위기의 순간이면 나타나는 메모력을 꺼냈다.


노트와 펜을 놓고 하얀 종이에 써 내려갔다

 

"그래! 그래서 너 어떤 사람 만나고 싶니?"

"어떤 사람이면 만족하겠어?"

"원하는 거 일단 다 써봐!" 하면서 써 나가는데 이건 뭐 대자보인 줄.


<내 남자의 조건>

키 000 이상

목소리는 00한 느낌

피부색은 ~

손모양은 ~

연봉은 ~

직업군은 ~

성격은 ~


내 남자의 조건 리스트를 써 내려가며 점점 미소 짓고 있는 나.

수십 가지를 막힘없이 써 내려가며 나는 두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는 내 욕망 바로보기.  

나는 늘 눈이 높은 게 아니라 조금 까다로울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까다롭다 못해 상상 속의 동물 봉황이나 용쯤을 기준으로 놓고 이 세상에 딱 맞는 남자가 없다며 한탄하고 있었던 거다.

나의 조건들에 최소 50점이라도 맞을 귀인이 있을까?


두 번째는 잡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

연애, 결혼에 있어 하나 필요도 없는 것까지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정작 중요한 것들은 놓치고 있었던 거다.

20대에 진즉에 버렸어야 할 손 끝 모양까지 기준이랍시고 머리에 넣고 있었으니 어떤 남자가 나에게 맞는 남자인지 고를 눈도 없었던 거다.


드디어 다시 돌아온 무인도 질문 이야기.

결국 나는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무인도에 같이 갈 남자가 꼭! 가졌으면 하는 3가지는?"


내가 리스펙 하던 질문을 셀프로 던지다니.

뭔가 본질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다.


키고 뭐고 진짜, 정말, 빼놓을 수 없이 너한테 중요한 게 뭐야?


나는 깊이 고민했고 무인도 필수템을 3가지 골랐다.


첫 번째는 샤프한 실루엣

두 번째는 책임감

세 번째는 다정한 성격


무릎을 탁!! 너무 클리어 해졌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가진 남자라면 한평생 배필이 되어도 좋겠어!

자유연애를 즐기되 이 세 가지를 가진 남자가 나타난다면 결혼하자.

이 조건이 아닌 사람이라면 마음 편하게 연애라도 하면 되고~!"


나의 기준을 확실하게 알고 나니 연애도 편해지고, 좋은 사람 찾는 눈도 길러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소름 끼치게 저런 남자를 만났다.

심지어 그와 결혼도 했다.

근데 더 소름 끼치는 건 세 가지 조건 외에는 그전에 내가 바랬던 거의 대부분의 조건이 가지지 않은 분이라는 사실~!


내가 무인도 질문을 통해 정말 중요한 기준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 역시 스쳐 보냈을 것이다.

  

무인도 질문의 위대함은 이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것들 속에서 진짜 중요한 본질을 찾게 해주는 질문이고

탈곡과 비슷한 작업으로 대답자로 하여금 중요한 씨알만 남기도록 도와주는 질문이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선택지들이 있다.

그 앞에서 정말 헛갈릴 때 조금이라도 선택지를 줄이고 싶다면

무인도 질문을 한 번 해보는 건 어떨지 강추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at 10AM] #1.15년 전부터 식은 죽 타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