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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 Oct 26. 2019

[at 10AM] #1.15년 전부터 식은 죽 타령

10시에는 나와의 미팅 시간

결혼을 계기로 '본의 아니게' 나의 전 인생을 돌아보게 됐어요. 


결혼식 며칠 전 엄마가 

"이거 이거 이거 어떡할 거야. 버려~ 말어?"

하면서 10년 20년도 더 된 케케묵은 제 흔적들을 방바닥에 던져 놓으셨거든요. 


일기장, 사진첩, 지난날의 연애편지들, 태지오빠에게 부치지 못했던 100일 엽서(100일 동안 쓴 엽서) 등등 


처음에는 귀여웠던 내 어린날이 반가워 '이야~ 이야~' '어머어머 이거 봐 ' 하며 한두 시간 들춰보며 노는데요, 그것들을 남편이 보면 어떨까 과연 귀여울까? 생각하니 죄다 소름 끼칠 만큼 부끄럽고 싫더라고요. 


특히 사진첩. 이 이름도 올드한 '사진첩' 속에 나는 뭐랄까... 


일단 저는 성형 안 했다는 연예인의 학창 시절 졸업사진 보면서 아무리 댓글에 성형을 했네, 코를 했네 시시콜콜 말들이 많아도 전 주로 믿어요. 다이어트와 메이크업만으로도 환골탈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거든요. 환골탈태가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수술 없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 피와 땀이 기억하고 있거든요.  

거의  환골탈태 수준의 애프터가 형성된 지금. 사실 그런 연예인도 굴욕샷을 남기는 학창 시절 사진인데 저는 어땠겠어요. 


엄마가 그 시절 사진을 보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참 희한하다... 그때는 그렇게 예뻤는데 이게 뭐 일노?" 


동생이 한마디 거들더라고요 

"거봐~! 내가 못생겼다 그랬잖아! 내가 그때 그랬지!?" 


그 잔인한 대화 속에서 '나도 알거든!? 어쩌라고!'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아... 고슴도치 엄마도 사진을 보며 '한탄'을 하시고, 친동생이 저렇게 '팩폭'을 하는데 이거는 세상에 나오면 안 되겠구나.. 하며 도로 박스에 넣어놨어요. 

'질 좋은 인화 사진'이라 옛날 사진처럼 빛 바래지도 않을 것 같고, 데이터가 날아갈 가능성도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그리고 태지오빠에게 부치지 못한 100일 엽서. 

누가 봐도 신혼집에 가져갈 수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친정에도 둘 수 없었어요. 

엄마가 "니 이거 안 가져가면 갖다 버린다"라고 하셨거든요. 

 

그 엽서는 5장씩 가로로 붙이고 밑으로 20장을 엮어 붙여 긴~ 플랜 카트처럼 제작을 했더라고요. 고등학생에게 이 정도의 덕질이라니...  대학생에 가까운 꽤 성숙한 나이인데 엽서 내용은 더 가관이었어요.  

그때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는  

"오빠 저 일본어 18점 맞았어요. 주관식은 0점이고요." 

 

18점 받은 건 그렇다 치고 뭐 자랑이라고 팬레터에 이런 구린 내용을 ㅋㅋㅋㅋㅋㅋ 

내가 이런 ㅂㅅ이었나 ㅋㅋㅋㅋㅋㅋ 

웃다가 눈물이 흘렀는데 어떤 의미의 눈물이었을까요? 


여하튼 슬프지만 곰팡이마저 생겨버려 위생상이라도 안 버릴 수가 없었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내 엽서 ㅠㅠ 문득 그립지만 역시 소장하고 싶진 않네요. 


<보금자리 이주 품목> 1차 탈락 아이템이 또 있죠. 

바로 연애편지. 

구구절절 편지 쓸 시절도 아니었는데 그놈에 군바리랑 사귀는 바람에 일주일에 한두 통씩 받은 편지가 박스 안에 가득하더라고요. 박스 안에서 쏟아진 그리움의 상징인 노란색 봉투 물결. 또 소름이 끼쳤습니다. 


전 남자 친구와 언젠가 한 번 대판 싸우고 '너에게 받은 물건 모두 돌려줄게' 하는 마음에 그 편지 상자를 들고 걔네 집 앞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엉엉 울었는데... 

아니 그때 준 거 아니었나? 왜 또 있지 (긁적긁적) 


그 시절 매일매일 우체통 확인하며 편지 한 통이 간절했었는데.. 두어 장 남짓 되는 편지를 읽을 때면 눈물이 앞을 가렸는데... 


내가 이 훈련 얘기, 축구 얘기, 초콜릿 얘기에 눈물 흘렸단 말인가. 


아련하다가 빛바랜 감정이 허무해서 우습다가 그러더라고요. 

아무리 상상해도 그때의 간절함이 10%도 떠오르지 않는데 그게 왜 씁쓸했을까요. 

군 시절 앞, 뒤로도 몇 년 더 포함된 연애라 끝내고 나서는 길고 지루했다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이랬구나.. 

너무 멀어져서 점으로 밖에 안 보이는 그 시절 나의 모습과 잠깐 스치며 '안녕'하고 다시 제 갈길로 가야 했죠. 

마음 한편 좀 묵직했지만 모조리 버렸어요. 


죄다 1차 탈락하는 초유의 사태에서 겨우 건진 건 일기장과 다이어리 정도예요. 

남편만 나 몰래 훔쳐보지 않는다면 평생 소장하고 싶은 것들인데 또다시 세월이 흘러 며칠 전 다시 꺼내 보니 이것도 가지고 있어 무얼 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죽으면 이 노트들이 의미가 있을까? 

자식들이 가진다고 그들에게 도움이나 추억이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것도 슬슬 정리를 해야겠다 싶네요. 


길도 모르고 치열하기만 했던 20대의 이야기와 뭘 좀 알아가던 30대 초반의 숱한 각오들이 적힌 종이들 속에서 진짜만 추려서 콤팩트 하게 정리해보려고요. 

딸이 가지고 있어도 좋을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 싶어 이런저런 궁리 중이에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노트들도 폐기하려고요. 

종이 곳곳에 묻은 손때가 그립겠지만 사람도 죽어 없어지는 마당에 뭐가 아쉽겠어요. 


이 정리 프로젝트의 이름이자 책의 가제는 <인생 바닥에서 먹는 식은 죽 레시피>로 정했어요.

근데 세상에 2004년에 한 메모 중에서도 이 '식은 죽' 타령이 있더라고요. 


여하튼 어떤 식은 죽인지 매일 조금씩 이야기를 정리해 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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