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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문 Aug 12. 2019

베트남에서 야간버스 타기

다낭에서 응에안까지 왕복 1000km

2019년 8월 6일(화) 저녁, 다낭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아내와 호치민의 고향 응에안(Nghe An)에 가기로 했다. ‘호치민의 나라, 베트남’이란 글을 쓰면서도 정작 호치민의 생가에 가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응에안으로 가는 항공편이, 직항 노선은 드문 데다 다낭-호치민-응에안, 다낭-하노이-응에안처럼 경유 노선은 6~8시간이나 걸려서 비행기의 이점은 적고, 비싼 요금이라는 단점만 남아서였다. 아내는 앞으로 우리가 나이가 더 들어 체력이 떨어지면 ‘장거리 야간버스를 체험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대구도 가보지 못했던 경산 시골 아이는 아침 7시 통근열차를 타고 강원도 삼척 이모 댁을 찾아 나섰다. 몇 번을 반복해서 삼척까지 가는 방법을 말씀하신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경산역에서 기차를 탔다. 대구역에 내려, 영천행 기차를 탔다. 영천에서 영주행 기차를 옮겨 탔다. 영주에서 삼척행 기차를 마지막으로 갈아탔다. 기차 갈아타기를 세 번 한 끝에 거의 저녁 8시가 넘어선 시각에 삼척역에 내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홀로 13시간 초행길 장거리 기차여행을 완수한 나였지만 그럼에도 육순의 나이에 9시간의 야간버스는 분명 또 다른 도전이었다. 


저녁 9시에 출발하는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 8시 20분경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응에안행 버스에 올랐다. 캐리어는 짐칸에 실었다. 차장은 비행기 수화물처럼 물표를 캐리어에 붙이고 한 장은 나에게 주었다. 내릴 때는 물표를 주어야 내 캐리어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베트남 여행 중에 버스를 탔던 한국 관광객의 수화물이 사라진 억울한 사연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항공기 방식으로 수화물을 처리해주니, 안심이 되었다. 예약된 승객이 다 탔는지 버스는 10분 일찍 출발했다.  

  

도착 예정은 다음 날 아침 6시다. 장장 9시간이 걸리는 야간버스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유럽과 미국, 남미, 중동을 경유 없이 8~10시간 거리를 여행한 적이 있다. 경유까지 포함하면 총 비행시간이 24시간을 넘긴 여행도 두 번 있었다. 어디까지나 항공 여행이었다. 경유도 없이 버스를 타고, 논스톱 9시간을 여행하리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야간버스 9시간 여행은 그렇게 설렘을 안고 시작되었다. 


고속버스의 외관은 한국과 같았다. 하지만 내부는 좌, 중간, 우 3열이 2층 구조를 갖춘 배치였다. 중간열 2층석에 앉은 나는 허리를 곧게 펴면 버스 천정에 머리가 닿을 듯했다. 통로는 어깨를 돌려야 겨우 통행이 가능했다. 좌석 끝 번호가 44번이니 한 줄에 7명 정도의 승객이 일 층에 세 줄, 이 층에 세 줄로 늘어져 있고 마지막 뒷자리에 두 명 정도가 더 탄 것 같았다. 좌석은 누워서 취침이 가능하도록 180도로 내리고 90도 정도 올릴 수 있었다. 항공기 1등석과 같은 구조이다. 그러나 공간이 좁아서 몸을 쉽게 가누기도 어려울 지경이니 항공기 1등석은 언감생심이다. 기존 좌석을 모두 들어내고, 새로 설치한 3열, 2층 구조의 좌석이 얼마나 튼튼할지, 약간의 충격, 급한 코너링을 할 때 내가 앉은 가운데 열 2층석은 무사할까하는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버스를 탈 때 신발은 벗고, 비닐봉지에 담아야 한다. 신발은 자기 좌석으로 들고 가서 다리를 뻗는 작은 공간 안에 밀어 넣었다. 우리보다 먼저 탄 사람들은 모두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담요까지 덮은 모습으로, 일찌감치 잠자기 위한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아내는 1층, 나는 2층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1, 2층석을 따로 얻어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2층 자리가 아닌 1층석에 아내가 앉을 수 있었다. 

 

베트남 사람에게 야간버스는 일상의 이동수단이어서 그런지, 살짝 불안한 우리와는 달리 모두 편안한 모습이었다. 엄마아빠를 따라온 아이들은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는 듯했다. 꼬마 녀석들의 재잘거림은 쉴 새가 없었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버스를 놀이터로 만들었다. 소란하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어는 다른 사람을 부를 때 호칭 마지막에 ‘어이’라는 어휘가 붙는데 어른도 아이도 ‘어이’ 라고 불러 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들렸다. 그렇게 소음과 혼란은 버스가 출발하고도 한참동안 지속되었다.

  

베트남 다낭에 자리 잡은 지 5개월 만에 다낭에서 훼(Hue)까지 친구와 함께 야간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다. 열차는 하노이-호치민까지 장장 1500여 km를 달리는 장거리 노선이었다. 다낭-훼 구간은 109km, 2시간 30분의 여정이었다. 밤에 훼에서 열차를 타니 역무원이 승객들에게 담요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친구와 나는 이 더운 나라에서 왜 담요를 주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받지 않았다. 열차에는 객차 실내등을 켜고 끄는 스위치가 좌석 중간쯤에 있었다. 밤 9시가 넘어가니 익숙한 승객이 직접 스위치를 내려 객차 내 불을 껐다. 그때부터 담요가 힘을 발휘했다. 아이들을 동반한 부모는 좌석 앞바닥에 담요를 깔고, 키 작은 아이들을 그곳에 뉘였다. 통로도 빠르게 침대 석으로 변신했다. 승객들은 미리 준비한 박스종이를 깔고, 다시 그 위에 담요를 깔아 잠을 청했다. 내 뒷좌석에서 뭔가 자꾸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뒷좌석 바닥에 누운 여성이 한 다리를 들어 올려 우리 좌석으로 발을 내민 것이다. 영화에서 보았던 피난열차와 비슷한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고속버스라고 생각한 차는 다낭을 출발한 지 10분 만에 정차하더니 다른 승객들이 탔다. 밤 12시가 되기 전까지 버스는 정차를 거듭했고, 새로운 승객들이 계속 버스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탄 버스는 고속버스가 아니라 중간 중간 정차하여 손님을 태우는 완행버스였던 것이다. 중간에 탄 사람들은 표도 끊지 않았는지 차장(남자)에게 직접 돈을 건네주었다. 미리 예약은 하고 요금은 나중에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타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밤 10시 30분. 살짝 잠이 들었는데 실내가 시끄럽다. 버스가 정차했고, 사람들이 내린다. 운전기사는 시장한 지 삶은 계란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를 상상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작은 가게 하나가 전부였다. 내린 김에 여행기분을 내자며 20k(한국돈 천 원)를 주고 과자 한 봉지를 샀다. 37분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휴대폰 보는 몇 사람을 제외하곤 다들 잔다. 밤 11시경, 버스는 훼를 지나고 있었다.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가다 섰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만석을 채우고 달렸다. 
 

불이 켜졌다. 잠든 사람들은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2시 34분, 잠시 쉬기 위해 휴게소에 도착한 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따라 내린 바깥 풍경은 휴게소가 아니라 도로변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가게도 하나 없고 당연히 화장실도 없었다. 두리번거려보니 남자들은 앞쪽, 여자들은 버스 불빛이 적은 뒤쪽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있었다. 연착이 일상화된 베트남에서 얼마동안을 더 가야 하는지, 그 곳에는 화장실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버스가 정차한 합법적(?) 노상방뇨 장소이니, 뭐라 할 형편이 아니었다. 우리 나이 쯤 되는 한국 사람이라면 어릴 때 한번쯤 경험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이 나이에 한국에서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일이기도 하다. 다른 손님들이 타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버스를 타자 차는 곧 바로 출발했다. 

  

구글맵을 보니, 버스는 훼를 지나, 동하(Dong Ha)를 지났다. 동하를 조금 더 올라 북위 17도선 남북 베트남의 경계선이었던 벤허이(Ben Hai)강도 벌써 통과한 뒤였다. 거기서 한참을 더 올라 동허이(Dong Hoi)도 지났다. 30분 정도만 가면 하띤(Ha Tinh)시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 위로 응에안 성의 주도인 빈(Vinh)시가 까마득히 보인다. 도착 예정이 6시라 했으니, 아직 3시간 20분을 더 가야한다. 새벽 5시, 날은 밝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통하지 않는 말로 “언제쯤 내리느냐?”고 물었다. 차장은 알아들었는지 모르는지 손가락 7을 내밀었다. 7시에 내린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1시간 더 걸린다는 이야긴데. 종잡을 수 없었다. 

   

차장이 바빠졌다. 5~10분 정도 단위로 버스는 정차를 거듭했다. 차장은 버스 안 여기저기를 다니며 다음 주소지에서 내릴 승객을 찾아 깨웠다. 차장은 승객이 어디에서 내릴 지에 대한 현황판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야간버스가 ‘자는 승객 깨우고, 하차 안내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도 불안해하지 않고 좀 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수화물을 맡긴 사람은 차장에게 물표를 주고 물건을 찾아 갔다. 어둠이 걷힌 차창 밖 도로 옆으로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고 이삭이 핀 벼는 작은 키였지만 파릇하고 힘이 넘쳤다. 

 

우리가 내릴 즈음이 되자 아내는 만나기로 한 제자, 히업 씨에게 전화를 했다. 히업 씨는 벌써 정류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5시 46분이니, 14분 뒤에는 도착할 것이다. 히업 씨는 차장에게 전화를 해서 도착시간을 확인하고 내릴 곳도 차장에게 미리 귀뜸해 두었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차장은 아직 말이 없다. 내릴 지점을 통과할 세라 긴장하며 구글만 쳐다보다가 우연히 차 앞면 유리창에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긴 버스여행의 갑갑함을 조금은 덜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잠시 후 5시 50분이 되자, 차장이 우리 자리로 와서 내리라는 신호를 했다. 백팩과 손가방, 신발을 들고 차문 앞으로 나왔다. 오전 6시, 예정된 시각에 버스에서 내렸다. 차장에게 물표를 주고 캐리어도 찾았다. 

   

응에안 여행은 희업씨의 고향인 타이화(Thai Hoa)에서 시작되었다. 히업 씨는 한국에서 근로자로 5년을 보내고 올 7월에 고향인 응에안으로 돌아온 터였다. 아내는 한국에 있을 때 히업 씨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언젠가 꼭 히업 씨 고향을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이번 여행은 히업 씨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업 씨의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부모님께서 정성껏 차려주신 아침과 점심을 대접받았다. 히업 씨 외삼촌댁에 가서 92세 된 외할머님도 뵈었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의 또 다른 제자, 진 씨의 부인과 딸도 만났다. 한국에서 근로하고 돌아온 아이・타이 자매가 사는 끌로(Cua Lo)시도 방문했다. 끌로 해변은 다낭의 미케해변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전기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맛있는 조개구이며 해산물을 맘껏 먹고 함께 밤바다도 거닐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번 돈으로 지은 멋지고 화려한 타이 씨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근처 식당에서 아침식사와 차를 마시고 타이 씨와 작별한 후에 주도인 빈(Vinh)시로 향했다. 호치민 생가와 인근에 있는 호치민의 부친 생가도 보고, 아내가 SNS로만 알고 지내던 베트남 한국어 강사가 일하는 학원도 찾아보았다. 차를 렌트해서 빈 시의 여기저기를 다녔지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날씨가 너무 더웠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베트남 운전기사도 지친 듯 보였다. 우리가 탄 버스정류장은 끌로 시 방면에 위치해 있었다. 다낭 행 버스는 출발시간이 8시 30분이었지만 일찌감치 4시 반에 버스터미널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하루 종일 빌리는 조건으로 1300k(6만5천원)를 지불하기로 했지만 차량을 약속시간보다 3~4시간 빨리 보내준 셈이다. 우리는 터미널에서 간단히 쌀국수를 먹고 8월 8일(목) 저녁, 다낭행 버스에 20분 일찍 승차했다. 

 

버스의 수화물 칸에는 엄청난 양의 짐이 실렸다. 오토바이도 1대 들어 있었다. 바라바리 포장한 박스, 보자기로 싼 상자 등을 뒤쪽부터 차곡차곡 무작위로 실었다. 올 때와 달리 캐리어를 수화물 칸에 넣으면서 물표를 붙이지도, 주지도 않았다. 지역이 다른 탓인가,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은 탓일까? 다른 승객들도 짐을 맡기고는 물표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짐만 맡기고 버스에 올랐다. 물표를 달라고 해봤지만 없다고 하니 도리 없이 그냥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좌석번호는 31번, 32번이다. 버스 제일 뒤편 2층 자리이다. 2층 마지막 좌석은 5개가 좁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덩치가 큰 사람이 옆자리에라도 타면 낭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좌석은 두, 세 번째 딱 중간 자리였다. 급정거라도 하게 되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듯하다. 히업 씨는 우리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2층 제일 뒷자리라서 아내가 좀 무서워한다고 했더니 차장에게 1층 자리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차장은 자리가 임의로 배정되어서 바꿔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나마 뒷좌석 중간 자리에서 왼쪽 편으로 몰아 두 자리를 배정해 주어서 좀 편해졌다.


야간버스는 출발 전에 벌써 만석이었다. 우리 좌석 밑 1층 통로에는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이불을 깔고 누웠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밟지 않기 위해 양옆 침대 끄트머리를 밟으며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며 출입해야 했다. 통로에 자리 틀고 누운 이 사람은 그 긴 시간동안 화장실 한번을 가지 않고 잠을 잤다. 야간버스 이용을 위해 하루 정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준비를 했던 것일까. 통로까지 점유당한 버스는 예정시각보다 3분 일찍 출발하였다. 다음날 새벽 5시 도착 예정이니 8시간 30분을 가야 했다.

  

출발하기 전 차장을 보니, 비가 내린다. 스콜성인지 빗줄기가 거세다. 버스가 출발한 뒤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소란하다. 꼬마 녀석들과 우리 부부만 이 버스의 유일한 여행객일 것이다. 불이 꺼지면서 우리도 곧 담요를 덥고 잠을 청했다. 올 때와 달리 버스 뒷자리의 2층 자리는 물결치듯 요동쳤다. 비까지 거세게 몰아치니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큰 사고가 날 판이었다. 게다가 안전벨트도 없지 않은가. 도착지를 몰라 불안해하며 갈 때와는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해와 제대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불이 켜졌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류소에 도착한 모양이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람도 있다. 잠자는 아내를 깨워 바깥을 다녀왔다. 비는 아직도 세차게 내린다. 작은 가게가 있는 정류장이어서 비는 맞지 않았다. 여기가 어딜까? 버스는 하띤성(Ha Tinh성) 약간 아래쪽 껌 수엔(Cam Xuyan)을 지나고 있었다. 1시간 45분을 왔으니 다낭까진 아직 한참이다. 2시경, 버스는 한 번 더 정차하고 새벽 5시 2분에 버스는 다낭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의 아침은 활발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에게 택시와 그랩(grab) 기사들이 경쟁하듯 호객 행위를 한다. 3박 중 2박을 버스에서 보낸 응에안 여행은 재미있고 불안하고 고생스러웠다. 한편으론 베트남을 알고, 베트남 사람을 이해하는 귀한 경험이었다. 1700km의 긴 국토를 가진 폭염의 나라 베트남에서 야간버스는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밤에 달리니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다낭에서 끌로까지 버스요금도 1만2천이니 15만 원이 넘는 항공료와 비교해 가격도 착하다. 야간버스는 값싼 장거리 이동수단이자 잠자는 이동호텔인 셈이다. 10년 후에도 이런 경험이 가능할까 싶다. 건강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베트남에서 왕복 17시간, 1천km의 야간버스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다시 야간버스 여행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우선은 ‘글쎄’라고 대답할 것 같다. 처음에는 버스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한 번 겪어보니 장거리 야간버스의 안전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비라도 세차게 내리게 된다면 더 불안할 터이다. 베트남에 머물면서 우리는 또 다른 미션을 찾게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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