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퇴근길에 문득 집에 반미(Banh Mi; 바게트 빵)가 떨어진 게 생각났다. 반미는 야채와 계란 정도만 첨가하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구비해두는 편이다. 반미를 사기 위해 사무실에서 조금 둘러 가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위가 좋지 않은 아내가 어젯밤 소화가 안 된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아내가 아직 약을 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트에서 빵 10개를 사고, 가게 건너편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베트남은 1986년 개방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당시에는 영어 교육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조차 영어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 물론 요즘 들어 어린 아이들부터 젊은이들까지 영어 열풍이 불고 있지만 말이다. 50대로 보이는 동네 약사도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약국에 갈 때마다 휴대폰 번역 어플을 사용한다.
그날도 휴대폰을 꺼내서 구글 번역기에 ‘소화제’라고 쳤다. 베트남어로 번역되어 나온, ‘Chất chữa cháy’를 약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약사는 약을 주지 않고 그냥 약국과 연결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잠시 후, 약사 대신에 딸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왔다. 나는 다시 아가씨에게 휴대폰 글자를 보여주었다. 아가씨도 갸우뚱하더니 약사와 마찬가지로 아무 반응 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가 자주 가는 동네 약국
다시 나온 약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약을 하나 내밀었다. 보니 물에 넣으면 풀어지는 발포성 비타민 같아 보였다. 의아해서 다시 “소화제, 여기에 쓰여 있는 것 주세요.” 라고 베트남어로 번역된 문장을 보여 주었다. 약사는 알아들었는지 몰랐는지 다른 것을 찾는 시늉을 한다. 나는 한 번 더 ‘덩어리로 된 것 말고 파우더, 가루로 된 것’을 달라고 요구했다. “가루 소화제”라고 써서 번역 어플을 보여주었다. 약사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하고는 바로 해당 약을 찾았다.
약사는 파우더 형태의 약을 주었다. 나뭇잎이 그려져 있고 ‘Sensa Cools’라고 적혀 있었다. 겉포장의 모양으로 추측해보건 데, 한국의 생약 성분의 약처럼 보였다. 한참을 기다린 끝이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여섯 포가 든 약 한 통을 받아들고 약국을 나왔다. 한 통에 2만동(우리 돈 1천원), 약값이 싼 것에 위안을 삼으면서.
집에 돌아온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내에게 약을 내밀었다. 하루 종일 속이 불편했던 아내는 반갑게 약을 받았다. 그런데 가루 형태의 약을 받아든 아내는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나는 직접 베트남어로 번역한 글자를 보여주고 산 약이니, 소화제가 틀림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내는 다소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약을 먹었다. 물을 마시며 아내는 ‘레모나’같은 맛이라며 비타민C 종류 같다고 말했다. 아내는 확인을 위해 약봉지 사진을 찍어서 세 명의 베트남 제자들에게 전송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비타민이라고 했다.
약사는 왜, 소화제를 달라고 했는데 비타민C를 주었을까? 아내는 ‘Chất chữa cháy’라는 글자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이건 어디에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자들은 마트에서 살 수 있다고 했다. 마트에서 약을 파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내는 ‘왜 소화제를 마트에서 파느냐’고 되물었다. 제자들은 불을 끄는 것이기 때문에 마트에서 파는 것이라고 했다.
눈치 빠른 제자 한 명이 “선생님, 혹시 소화가 안 되십니까? 그러면 약국에 가셔서 투옥 티에우 화(Thuốc tiêu hoá)를 달라고 말하면 됩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약국에서 파는 진짜(?) 소화제 사진을 보내 주었다. 그제야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파악이 되었다.
내가 약사에게 보여준 소화제 ‘Chất chữa cháy’는 먹는 약, ‘소화제’가 아니라, 불 끄는 ‘소화제’였던 것이다. 베트남어도 한국어처럼 한자어가 뿌리인 나라이다. 비록 지금은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베트남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도 60~70%에 달한다. 한국어는 한자가 달라 뜻이 달라져도 두 개의 글자가 똑같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베트남어는 뜻이 달라지면 글자도 달라진다. 즉, 음식물 분해를 촉진하는 ‘소화(消化)’와 불을 끄는 ‘소화(消火)’는 한자어가 다르기 때문에 베트남어로는 다른 글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번역기 어플에 한국어로 ‘소화제’라고 썼으니, 한자어의 차이를 모르는 어플은 소화(消火)라는 베트남어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약사는 고심 끝에 ‘몸의 불을 끄는 약’을 주었던 것이다.
약사는 Cool이라는 단어를 보고 몸을 좀 시원하게(불을 끄는) 해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내와 나는 바보 같았던 이 날의 에피소드를 서울에 있는 딸들과 공유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실제 소화제는 먹지 못했지만, 한나절 겪은 소동 덕분에 아내는 저절로 소화가 되는 기분이라 했다.
베트남에 와서 베트남어를 나름 공부하고는 있지만, 참 어렵다. 여섯 개나 되는 성조 때문이다. 정말 주의해서 발음을 해도 현지인들은 알아듣질 못한다. 언어는 소통의 기본이다. 배우기 쉬운 외국어가 어디 있으랴마는, 최소한의 소통이라도 되어야 한다. 나로 인해 당황했을 그 약사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하고 미안하다. 그리고 소통이 되지 않는 외국인의 말을 성심껏 이해해보고자 애썼던 약사에게 고맙기도 하다.
영어권 외국인들은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말을 거의 배우지 않는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내는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자주 불평을 한다. 우리 부부는 베트남에 사는 동안만이라도 되도록 현지인과 베트남어로 소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소화제’ 소동을 겪고 보니, 아직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엄청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 학생이 보내 준 먹는 약, '소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