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가칭 Together Toward Jesus(TOTOJE)의 시범 운영 중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평신도들끼리 모여 신앙서적을 읽는 것에 대해 괜한 불편감이 들었던 이유는,
내가 주도할 일이 아니라 목회자에게 기대어 가야 모양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밖에서 책모임을 할 때는 없던 부담이 교회 안에서는 생기는 걸까?
이게 정말 교회 공간을 빌려서 해도 되는 일인가라는 의문마저 들었던 건 내 문제일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찝찝함이 잔존하지만, 그렇다고 밀려오는 다른 부담감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렇게 TOTOJE(가칭)의 시범 4회 모임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책을 읽자고 하면 흔쾌히 승낙할 것 같은 3명과 그중 한 명이 섭외한 2명이 합류하면서
총 6명이 함께 모였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함께 주님을 힘써 아는 것!
일단 내 전문 분야인 낭독으로 시작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인생 베이직(태어남, 결혼, 죽음)'과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까지
총 4권을 선정했는데,
1) 각 권은 1시간 반-2시간가량 낭독하면 한 권을 다 끝낼 수 있을 만큼 짧아서
1주에 1권을 읽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2) 베이직 시리즈는 작년 함께 사역한 전도사님이 선물해 주셨고
'자유'는 지금 섬기는 부서의 강도사님의 강추 도서이다.
그러니 혹시 기독교 낭독 독서 모임을 하고 싶다면 요 4권의 책은 읽을 만도 하고 믿을 만도 하다.
21세기의 C.S.루이스
팀 켈러는 미국의 목사, 신학자 및 기독교 변증가이자 뉴욕시 리디머 장로 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설립자이다. 그는 1989년 아내 케시 사모와 3명의 아이들과 함께 리디머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20년 동안 다양한 젊은 직장인들을 지도하며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여러 도시에 교회들을 개척하고, 도시문화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나 자료들을 출판하는 ‘리디머 시티 투 시티’(Redeemer City to City)의 이사장도 맡았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48개 도시에서 250개 교회를 개척했다. 복음연합을 2005년에 D.A. 카슨과 세워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존 파이퍼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 인정받는다. 실천적 변증론의 관점에서 목회 철학을 세웠다.(출처 :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2018년 영아부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며 교사들과 함께 읽었던 <탕부 하나님>으로 목사님을 처음 접했는데, 그간 접했던 '돌아온 탕자'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전복시며 내 신앙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탕부 하나님>에 관한 목사님의 생전 설교 영상을 옮겨 둔다.
https://youtu.be/cx3bpoYX4-U?si=Dp3JA0MHof-Yh3yD
팀 켈러 목사님은 바울의 궁극적인 자유를 본인의 주특기인 변증을 사용하며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존감과 자아에 대한 관점을 분석한다. 내가 고민하던 포인트 발견!
20세기 이전 전통문화에서는 사람이 자만심이 모든 범죄의 원인이라고 믿었지만,
현대는(물론 아직도 전통적 문화를 따르는 곳도 있다) 인간이 자존감이 낮아 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사족을 붙여보자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과 함께 정신 분석학의 발전과 각종 심리분석 등이 난무하면서 더더욱 이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은 어느 쪽이 더 맞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한 면으로 설명이 안 되니 반대로 해석하려고 하는 인간의 치열한 노력일 뿐이다.
고전 4:6에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어느 한 편을 들어 다른 편을 얕보고 뽐내는 교만을 그치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교만'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쓰이는 '휴브리스(hubris, ὕβρις)가 아니라 바울만 사용한 '푸시우(physioo, φυσιόω)'를 쓴다.
푸시우는 바람을 일으켜 불을 지피는 "풀무"에 해당하는 말로,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까지 이른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의 4가지 상태를 해설한다.
첫째,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가 처한 상태는 공허함입니다.
한껏 부풀어 올라 우쭐해 하지만 정작 그 중심은 텅 비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 자아는 그 자체로 고통 덩어리입니다.
부풀려지고 우울해진 자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아는 늘 분주합니다.
자아를 채우기 위해 자신에게 주의를 끄는 일로 여념이 없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 일 -비교하고 자랑하는 일-로 분주합니다.
넷째, 본성적인 인간 자아는 공허하고 힘들고 분주할 뿐 아니라 나약합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마냥 우쭐해지고 스스로 높아진 자아는,
그러나 늘 의기소침해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pp.20-33
바울은 고전 4:3-4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새번역)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평가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기준을 분명하게 한고 스스로 평가하라는 조언을 한다.
그러나 바울의 접근법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특정한 기준에 맞춰 삶으로써 자긍심을 고양시키려는 노력은 함정이요,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누구보다 더 자기 죄의 정체는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죄와 자신의 정체성을 연결 짓지 않습니다.
그의 죄와 그의 정체성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이 둘을 연결하기를 거절합니다.
자기 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죄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크고 대단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하거나 우쭐해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온갖 종류의 죄들-자신이 이룬 많은 업적들은 물론-을 보지만,
그것들과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연관 짓기를 거부합니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여기되, 부르심을 받은 일은 중단 없이 해 나갑니다
pp. 42-43
다른 이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바짝 세우고 그 기준을 발견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몰두한 사람은 결국 다시 자기를 굴레에 넣어두는 꼴이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3)"까지 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덜 하는 것이라고 한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의 교만을 다루는 장 마지막 부분에서, 복음적 겸손을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스스로를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인상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사실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말합니다).
복음을 통해 진정으로 겸손해진 사람은 바로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충일합니다.
복음적 겸손의 핵심은 자신을 더 생각하거나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덜 하는 데 있습니다.
....
진정한 복음적 겸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경험과 대화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 짓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칩니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자유를 누립니다.
자기를 의식하지 낳음으로써 누리는 복된 평안이 있습니다.
참된 복음적 겸손은 부풀려지지 않았지만 가득 채워진 자아를 말합니다.
pp.44-46
마지막 장에서 바울의 말을 빌어 우리의 재판은 이미 끝났다고 한다.
우리의 심판자는 타인도, 나 자신도 아닌 주님이시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평결뿐이었다.
여기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나오는데,
다른 종교는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평결을 만들지만 기독교에서는 평결이 행위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 된 자는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남는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믿는 순간에 우리가 직접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를 자녀로 맞아들이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보다시피 평결은 이미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평결에 따라 행동합니다.
...
이제 순전히 즐거움 때문에 일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돕도록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pp. 56-57
저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데도 여전히 세상의 기준과 타인의 관심과 자신의 가치와 능력에 집중하고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것을 권한다.
여러분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은 지 수년도 더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그런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날마다 법정으로 다시 끌려들어 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느낍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어쩌면 계속해서 법정으로 끌려들어 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다시 복음에 합당하게 기도하고,
교회에 갈 때마다 다시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고,
삶의 현장에서 다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 내면서 이미 재판이 끝났는데도,
어째서 자신은 여전히 법정에 남아 있는지 스스로 깊이 물어보십시오
그곳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재판은 이미 끝났습니다.
pp.61-62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마지막 이 부분을 읽던 친구가 눈물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 결론이 나오기만 해 보라고 벼르며 읽었다고 했다.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다. 결론을 몰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며 믿음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한 것 같다며 가슴 아파하는 지체의 고백에 우리의 마음이 모아지고, 그럼에도 그분이 승리하실 거라고 믿는 순간을 늘려가기 위해 함께 읽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