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질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날의 만남 이후 나는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은 채 친구가 있던 단톡방을 조용히 나왔고, 몇 달 동안 우리는 개인적인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리고 불편한 감정을 애써 눌러 담으며 친구와의 관계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친구가 그간 나에게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나도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이상하게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무슨 의중으로 한 말인지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 떠오른 몇 가지 사례들만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사례 1. 내가 결혼준비에 한창이던 때, 친구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ㅇㅇ아, 결혼준비하는데 얼굴에 뭐라도 좀 해~"
(나는 결혼을 앞두고 운동도 하고 피부 관리도 받으며 나름 신경을 쓰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사례 2. 결혼 후 친구들을 집들이에 초대한 당일 날 도착 10분 전에 "ㅇㅇ아, 우리 집들이선물 신경 제대로 못썼어, 그러니까 오늘 음식 많이 준비하지 말고 대충 대접해 줘도 돼~"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싶었다. 내 입장에서 듣기로는 좀 더 신경 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례 3. 친구와 함께 쇼핑하다가 구입한 패딩이 있는데 오랜만에 만난 모임에 다른 패딩을 입고 갔더니 보자마자 하는 말 "왜 나랑 샀던 그 패딩은 안 입어?"
(서로 몇 달 만에 만났는데 내가 요새 그 옷만 입고 다니는지 친구는 알 길이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내가 지금 입고 있는 패딩은 안 어울린다는 뜻인가?)
친구와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간의 불편했던 여러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처음엔 화가 났고, 그다음엔 이상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허탈함만 남았다.
그간의 모든 일들은 다 차치하더라도, 그날 쇼핑몰에서의 친구의 배려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았다. 만약 다른 친구들이 약속 도중에 그렇게 갑자기 가버렸다면 친구는 과연 그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역지사지, 내로남불.. 이러한 단어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내가 겪으면 싫은 일을 타인에게, 심지어 가까운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친구를 불필요하게 배려하고, 길어진 취업준비에 힘들어서 그랬을 거라 이해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취업준비와는 무관한 개인의 특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뒤통수를 한방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후로 친구는 내가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않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모임이 있은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단톡방을 통해 다시 모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개인일정을 핑계로 시간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뒤이어 친구는 주말 중 하루는 괜찮지 않냐고 되물으며 나를 곤란하게 했다. 나는 기분이 더욱 나빠지기 시작했다. 본인이 모임 중간에 통보하듯이 빠진 것은 괜찮고, 약속을 잡으면 친구들은 모두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모습이란.. 친구에게 남아있던 약간의 정마저 뚝 떨어졌다.
그 후 분기별 생일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는 여러 핑계를 대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친구와 연락을 하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점점 편해졌다. 그러다 내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어느 날, 친구가 단톡방에서 모임 날짜를 잡자고 적막을 깼다. 나는 반 무의식적으로 답변했다.
‘이번 생일은 나 혼자 조용히 보내려고 해. 다들 신경 써줘서 고마워. 나 빼고 시간 되는 친구들끼리 만나~’
예상은 했다. 이내 친구는 단톡방을 가득 채운 장문의 메시지로 서운함을 표현했다. ‘바쁜데 시간 내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니 서운함이 쌓인다. 내가 그때 스포츠경기 보러 가서 화가 난 건가.. 내가 사회적 기피대상인가.. 미안 먼저 나갈게 ‘라는 말을 뒤로 친구는 단톡방을 퇴장했다. 사실 친구가 단톡방을 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본인이 서운하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면 장문을 쏟아낸 뒤 단톡방을 나오기 일쑤였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전화해서 오해를 풀고 달래주었을 나지만, 이번에는 덤덤했다. 나는 단톡방 창을 닫았다. 회사에서 밀린 업무를 마저 처리했고, 집에 들어와 운동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간 참아왔던 것들을 하나 둘 멀리하게 된다고 한다. 어쩌면 나 역시 지금 그 과정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은 지난 추억이 생각나고, 그간 친구와의 긴 시간들을 단번에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라도 불필요한 에너지소모를 줄이고, 나를 갉아먹는 관계를 청산하고 싶다.
그것이 나를 좀 더 사랑하는 방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