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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수없음 Feb 09. 2016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 시대의 수많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에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아일랜드의 어느 작가(John Boyne)가 쓴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모든 '잘 만든 이야기'의 공식대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며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어야 한다)

강렬하다.



아이일 수록 쉬운 것들이 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근본을 향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가령 단체복을 입고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을 발견했을 때 브루노가 했던 질문

'왜 저 사람들은 농장에서 잠옷을 입고 돌아다닐까?'과 같이 말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낡고 가벼운 옷을 입은 채 갇혀 있는가?'에 관한 질문은

'왜 누군가는 나보다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가'만큼 빠르게 근본으로 향한다. 


어떠한 편견도, 가치판단도 없는 아이의 시선이

영화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역사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순간, 우리가 했어야 함에도 하지 않았던 질문들. 

저 사람들은 왜 울고 있나.

저 사람들은 왜 굶고 있나.

저 사람들은 왜 죽게 되었나. 



탐험가를 꿈꾸던 한 아이와

시계공 아버지를 존경하는 또 다른 아이의 우정은 다른 것에 비해 특별히 값지거나 귀하지 않다. 


기대하고, 배신당하며 그 나이 또래들이 한 번쯤 겪어봤을법 한 흔한 에피소드. 

그럼에도 다시 마주앉아 마음을 고백하는 치유의 과정은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경험해왔던 삶의 확장이다. 


그리고 삶의 확장은 나의 나약함을 발견하고, 전과 같은 실수를 딛고 일어섦으로서 완성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확장을 끝까지 이루어내지 못하는 데에 있다.)


소설, 음악, 영화, 시, 드라마, 다큐멘터리. 

매체를 통해 우리는 삶의 확장을 꿈꾼다. 

개인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 혹은 깨달았어야 하는 시기에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되짚으며

내 작은 세계를 비추고 있던 빛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은 커다란 희열을 동반하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삶의 확장을 꿈꾼다. 


브루노는 스스로의 비겁을 직시하기 위해 행동했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브루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던 내가, 슈무엘의 죽음을 당연시 받아들였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말한다. 


브루노의 행동이 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경계'를 발견하게 한 것이다.


'내 세계'와 '다른 세계'를 결정짓는 경계는 한계와 다르다. 

범위의 끝을 의미하는 '한계'와 달리, '경계'는 다른 세계가 맞닿아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경계의 발견은 확장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유태인 중에는 훌륭한 사람이 없나요?'

근본으로 향하는 순수한 질문이 집단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항쟁이 발생한지 36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상의 무리를 만들어 그들을 매도하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 있다.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여야만 본인이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믿는 자들 속에서 

순수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슈무엘의 옷을 입은 브루노가 되어 줄무늬 파자마를 입어 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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