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소나기>를 되새기며
<소나기>... 아마 대한민국에서 모르면 '멍청한 놈' 이라며 진심으로 욕먹는 몇 안되는 소설중 하나일 겁니다.
이 작품이 그런 위상을 가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학계에서 '황순원'이라는 인물이 가진 위상과 이 작품의 수준높은 완성도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겠지요. 그리고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이라는 점도, 아마 <소나기>의 어마어마한 대중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을겁니다. 대한민국 입시교육의 순기능일까요? 덕분에 <소나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있어 <소나기>는 여러 의미에서 뜻깊은 작품입니다. 제가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듣게 된 첫 번째 수업의 첫 번째 수업내용이었거든요. 뭐든지 처음은 기억에 잘 남는다고 하죠, 저에게 있어 <소나기>는 어떻게 보면 제 인생의 수많은 '처음'중 하나로 기억이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저는 초등학교 6년 내내 다독상을 받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만, <소나기>라는 작품은 아예 처음 들어본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 대한민국 입시교육의 순기능 덕에 제가 이 작품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을 다 읽었을 때의 감정은... 아마 이 작품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았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며 가슴이 아려옵니다. 둘이 징검다리에서 만나고 논지 얼마나 됐다고, 둘이 산책 하면서 데이트도 했는데, 어떻게 그리 허무한 결말로 끝날 수 있는건가요. 아마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미신은 황순원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처음 그 미신을 만들어낸 사람은 분명 <소나기>를 읽은 독자일겁니다.
그렇게 <소나기>는 교과서 몇 장만 넘기면 다 읽을정도의 짧은 단편소설이 독자의 감정선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야기, 그것도 이어지고, 맺어지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마음에 아련함을 남겨준 것입니다. 이 아련함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소나기>라는 소설을 아냐고 물으면 적어도 "아, 그 첫사랑얘기?"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소나기>는 어떻게 우리들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잊히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제대로된 이름조차 없이 '소년'과 '소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랑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 걸까요? 인구 대다수가 콘크리트 건물과 전신주에 둘러쌓여 살아가면서, 소년과 소녀가 올려다 본 하늘에는 없었을 희뿌연 미세먼지와 촘촘한 전깃줄이 군데군데 가리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살고 있건만, <소나기>는 우리에게 작품, 그 이상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는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타인이 그들을 부르는 호칭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우리들, 즉 독자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어느 지방에 사는 누구의 아들인지, 얼마나 이쁨을 받으며 자라온 소녀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단순히 그들이 함께 걷고, 함께 젖고, 함께 머물렀던 그 짧은 시간을 지켜볼 뿐입니다.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순간의' 기억으로 독자들에게 남게 되는 것이죠. 아마 황순원은 <소나기>가 다른 소설들과 다를 바 없이 가상 인물들의 짜임새있는 허구적 이야기로 남는 것이 아닌, '독자들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독자들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에 많은 것을 끼워넣게 됩니다. 소년과 소녀가 독자 자신일 수도 있고, 알고 지내는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오늘 출퇴근길에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이름모를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조차 없던 소년과 소녀는 모두의 이름을 가지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가지고 있던 '익명성'이 어느새 독자들에게 '보편성'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익명성의 보편성으로 전환되는 것은 비단 소년과 소녀 뿐만이 아닙니다. <소나기>의 배경은 그 인물들만큼이나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 마을의 지명조차 모르며, 그저 이름없는 풀밭, 논두렁, 시냇물, 하늘과 같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의 이미지들만이 배경을 구성합니다. 단지 독자들이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 마을쯤 되겠거니 라고 생각하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배경은 소설의 배경이 보편적인 기억의 장소로 여겨지게 만들죠. 사람에 따라 그 장소가 지금도 살고있는 고향의 풍경일지도, 어린시절 자라왔던 시골일지도, 어린시절 방학때마다 놀러갔던 시골의 할머니댁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이야기의 무대를 독자들의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름 없는 공간은 마음속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이야기의 장소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보편성은 아마도 <소나기>가 세대를 넘어 기억되며 사랑받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저는 최근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중고등학생의 신분이었을 적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억의 향수를 느꼈습니다. 학원에 같이 다니던 어떤 여학우를 좋아했지만 아무 말도 붙이지 못했던 순간, 눈이 마주칠 때마다 괜히 고개를 돌렸던 기억, 언젠가 한 번 나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 이상하게 심장이 떨렸던 순간들.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한 감정이란 것을 몰랐고 점차 사라지는 감정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난 이제서야 그 감정이 얼마나 순수하고, 단단하고, 동시에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행복했던 감정이었던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소나기>는 저에게, 그리고 많은 독자들에게 언젠가 느꼈을 애틋하고 순수했던, 그것이 사랑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던 성장기의 감정의 기록 아닐까요? 그 감정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고,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았기에 잠시 잊혀졌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그 감정의 이야기를 <소나기>는 펼쳐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익명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분일초, 24시간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정보의 파도 속에서 이름을 숨긴 채 튀어나오는 무책임한 언행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단지 실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쉽게 찌르고, 자신마저도 모르는 얼굴로 타인을 밀어내는 것이 일상적으로 변해버린 것이죠. 하지만 <소나기>가 보여주는 익명은 그런 익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은폐가 아니라, 더 넓은 공간으로의 확장을 위한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더 많은 말이 가능해지는 것, 얼굴을 감춤으로서 더 많은 얼굴이 떠오르게 되는 것. 황순원은 <소나기>가 가진 문학적 익명성을 통해 독자와 작품을 연결시키고자 한 것 아닐까요? 생소한 지역에서 그럴싸한 이름을 가진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들에 반해, 감춰진 것이 더욱 많은 <소나기>가 독자들에게 깊은 유대감과 연결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소나기>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익명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름도, 시대도, 장소도 모르는 세계를 어떻게 공감하고 그곳에 자신의 기억을 투영시킬 수 있냐고. 하지만 저는 반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름도, 시대도, 장소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였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그 이야기 속 소년과 소녀의 이름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끝내 알려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수많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