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봄을 품고, 그 푸르름을 그리는 시간.
사춘기, 다들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 뜻 그대로 우리 모두 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보냈으려나요? 나를 항상 돌봐주던 부모님들에게 이상하게 반항하고 싶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떨어지고싶지 않아지는 그 시기. 맞습니다. 우리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부르고,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하는 그 기간을 사춘기라고 부릅니다.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는 멋진 뜻풀이를 가진 명칭이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우리주변의 청소년들은 과연 그 말의 울림을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요? 기대와 불안, 설렘과 혼돈을 하루에도 몇번씩 느끼며 언제가 올 믿는 푸르른 봄, 청춘을 과연 그들은 꿈꾸고 있을까요?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이 ‘봄을 생각하는 기간’은, 언제부턴가 봄을 상상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춘기란 본래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향한 시선을 배우며, 내면의 봄을 피워내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자연의 진리와도 같이, 가장 따뜻했던 유년기를 벗어나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자 겪는 가장 혼란스럽고 외로운 겨울인 것이죠. 그렇게 청소년들은 마음의 온도를 바꿔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이런 변화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 조차 아까운 모양입니다. 학교라는 공간과 입시라는 시스템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고, 자신의 봄을 그려나가야 할 사춘기라는 시간은 점수와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깎아내는 시기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교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계절의 변화와 매일매일 달라지는 구름의 모양을 느끼기보다 모의고사 성적의 등락으로 하루의 날씨를 결정짓습니다. 바깥에서는 따뜻한 햇살 속에 벚꽃이 흩날리지만, 그것조차 졸음과 잡생각을 몰고오는 부정한 것으로 치부되어 문제집의 여백 속에 묻혀 사라집니다. 봄의 색은 숫자와 등급으로 덮이고, 청소년들은 그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겪는 입시 제도는 늘 명확한 기준과 목표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꽃의 색을 정해 두고, 모든 꽃잎이 그 색과 크기로 피어야 한다는 듯. 그리고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꽃잎은 가차없이 낙오됩니다. 그 떨어진 꽃잎은 차마 자신이 피워낼 봄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색을 잃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고 이름지은, 그 과정이 맞을까요?
청춘이란 단어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자 드디어 꽃을 피워내는 시기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푸르름은 단지 나이를 먹어서 오는 계절은 아니겠지요. 청춘의 진정한 푸르름은, 사춘기라는 불확실한 계절을 견디고 자신의 길을 찾으며,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마음속에서 기르는 과정에서 찾아올 것입니다. 문제는 앞에서 말했듯, 오늘날의 청춘이 그 사춘기를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건너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봄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꿈을 꿀 수 있는 시간보다, 꿈을 확인하고 점수화해야 하는 시간이 앞서고 있습니다. 꾸지도 못한 꿈을 그저 쫓기만 하는 것이지요.
말이 나온 김에, 청소년들이 겪고있는 학교 생활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하루의 대부분은 시험과 과제, 학원, 독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학습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차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공부하지 못한 시간은 죄책감으로 채워지고, 휴식시간조차 그들을 옥죄는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몇 명이나 생각해낼 수 있을까요? 오히려 ‘몇 점을 받아야 하는가’, ‘몇 등급을 달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질 것입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는지 알지 못합니다. 시험지 위의 숫자가 자아를 대신하고, 대학 이름이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심지어 가장 작은 소망이자 어디까지나 "희망"이어야 할 장래희망조차 숫자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 크기를 제한당합니다. 그 안에서 스스로를 찾는 질문은 어느새 잊히게 되고, 불안과 피로, 무력감만이 남습니다. 사춘기를 지나 청춘으로 접어들어야 할 아이들은, 이미 봄을 생각하는 방법을 잊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청소년들이 보여주는 노력과 열정은 간혹 외신에 보도될 정도로 경이롭습니다. 새벽까지 불을 켜고 문제를 풀고, 자기 미래를 위해 시간을 쏟는 모습은 존경스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불꽃은 너무 거세게 타올라 스스로를 집어삼키기도 하고, 간혹 너무 빨리 꺼지기도 합니다. ‘공부’라는 열정이 삶의 일부가 아닌, 그들의 꿈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장작삼아 불꽃을 피우면서, 자신이 깎여나간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까지 그 불꽃 뒤에 찾아올 봄날을 기약하는 것이죠.
사춘기를 살아내며 느낀 불안, 방황, 혼란은 분명히 그들의 청춘에서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련은 시험지 위의 점수와 등급이 아니라, 그 불확실 속에서 피어난 자기 성찰과 선택이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들이 자신의 봄을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겪는 성장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사춘기가 단지 ‘성적 상승기’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잠시 멈춰 그들의 마음을 바라봐 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의 고민과 혼란은 미숙함이 아니라, 성장의 증거입니다. 그들의 불안과 피로는 혼란이 아니라, 삶의 감각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더 단단해지라고, 더 빨리 뛰라고 강요하기보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봄을 생각할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청춘의 푸르름은 경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삶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공부는 그 불꽃을 키워주는 도구이지, 꺼뜨리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켜주어야 할 것은 시험 점수와 대학교 간판이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봄을 꿈꿀 수 있는 마음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교실 창밖에는 계절의 순환이 진행되고 있을겁니다. 아이들이 그 계절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오늘이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심지어 봄일지라도 그 다음에 올 봄을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며, 그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푸른 청춘이 피어날 것입니다.
청소년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봄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른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봄을 기다려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교육은 단지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계절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계절을 바라보는 시선을 길러주는 일입니다. 그 계절이 피어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믿어주며, 기다려주는 일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언젠가 다시 자신만의 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봄은 더 이상 시험지 위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계절일 것입니다. 봄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미뤄질 뿐입니다. 사춘기의 불안과 혼란 속에도, 청춘의 싹은 자라고 있습니다. 그 싹이 자라 푸르른 봄으로 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봄이 왔다"
사춘기(思春期)는 봄을 생각하는 시간이고, 청춘(靑春)은 그 생각이 현실이 된 시간입니다.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그 봄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봄을 기다리기 전에 이미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 서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자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건넵니다.
당신의 봄이 그 무엇보다 푸르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