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소개로 기억하고 있던 영화. 어디선가 소개를 들으면 스포일러처럼 느껴져 선뜻 손 이 가지 않는데 포스터의 흑백 화면은 내게 너무 매혹적이었다. 올초 기생충의 수상을 점치면서 작년엔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로마가 언급되기도 했다.
결국 나는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태블릿으로...
주인공이 마당을 청소하는 구정물이 타일을 적시는 롱테이크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어릴 적 엄마가 마당을 청소할 때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한 적이 있다. 엄마의 무지개색 빗자루 소리가 경쾌했고 엄마가 주황색 바가지로 물을 뿌릴 때마다 쏴아 소리를 내며 자잘한 먼지들이 씻겨져 개수구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지켜봤었다. 엄마가 혹시 놓쳐서 물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 때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던 기억. 나는 물이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던가. 어서 엄마의 주황색 물바가지 속 물들이 기어코 기세 좋게 경계를 뚫고 나가 미지의 땅들이 적셔지기를 바랐던가. 아니면 마당에 뿌려지는 물이 마른땅 한 뼘 정도는 남겨두기를 바랐던가.
나는 다시 그 또래의 계집애가 되어 클레오가 개똥을 치우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다. 물들이 훑고 지나갈 때마 흑백 화면의 명암이 달라지고 어느새 생긴 구정물 웅덩이에 날아가는 비행기가 비친다. 그때부터 나는 과거의 멕시코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마치 투명인간이 되어 클레오를 졸졸 쫓아다니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빨래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손만 뻗으면 내 손바닥에 차갑게 닿을 듯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조마조마한 그녀의 데이트는 적실 듯 말 듯한 마당의 구정물들을 떠오르게 했다. 마침내 임신을 하고 여주인에게 고백을 하고 남자 친구가 배신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될 대로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거기에는 주인집 가정의 붕괴도 함께 그려지는데 차라리 어서 빨리 바닥까지 내려가 버리길 담담한 눈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새해 파티에서 임신한 그녀가 마시려던 음료는 타의에 의해 산산조각 깨어지고 숲은 불타는데 그것은 흔하면서도 절묘한 클리셰였다. 결국 아기는 죽고 국가도 그녀가 속한 가정도 혼란 속에 파괴된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져 내가 군중 속에 있고 폭행당하고 사산아를 출산한 거 마냥 감정이 끓어올랐다. 우리의 80년대 티브이에서 보았던 데모 풍경과 닮아 있어서일까... 정말 내가 겪은 일 같은 생생함이.. 이 영화를 본 지 두 달이 되어감에도 잊히지 않는다.
마지막은 바다여행으로 이루어진다. 남편이 완전히 떠나는 장면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여주인인 소피아가 계획한 여행에 아기를 보내고 기운을 잃은 클레오도 동행한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아이들이 익사할 뻔하는 것을 수영도 못하는 클레오가 가까스로 구해내고 울면서 했던 말.
''나는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기가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어요.''
''가여운 아가...''
아기가 사산한 걸 알았을 때 외에는 큰 감정표현이 없었던 클레오였지만 죽을 뻔한 아이를 살려내고서야 죄책감에 몸부림쳤을 이 말들을 꺼내 놓으며 아이처럼 엉엉 운다.
이 씬은 고해성사의 장면이기도 하면서 스스로 아이들을 구해내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클레오의 선언이기도 하다. 여주인인 마리아는 그것이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옆에서 계속 다독인다.
''괜찮아. 우리는 널 사랑해.''
그 위로의 말을 반복함으로써 기나긴 미련으로 남았던 그녀의 이혼도 스스로에게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들은 떠났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남아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상처를 위로받는 장면은 죽일 듯이 넘실대는 거친 파도를 배경으로 하여 위태위태하면서도 그래서 더욱 절실해보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당당하게 포스터로 쓰고 있듯이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알고 보아도 그 감동이나 여운이 덜하지 않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도 보게 되면서 남자인 감독이 보는 눈은 또 다른 시각이 더해져서 본 영화를 보고 나서 함께 보아도 좋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간 아빠를 묘사하는 씬에서 아버지가 한 행동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를 한 남자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다. 감독은 인물의 도덕성을 판단하지 않고 행동의 당위성을 보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이 오랜 시간 자신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를 캐릭터적으로 이해하게 해 준 셈이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에게도 위로와 치유가 된 영화인 것 같다.
각자의 인생에 원치 않는 일로 생겨난 죄책감이 있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다시 그 시절의 내가 옆에 있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픈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 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
영화에서 주는 위로를 잔말 말고 받아보자.
그것이 말뿐인 위로라도...
(필요하다면 요즘 유행한다는 셀프 포옹이라도 해보면서)
''괜찮아, 아가. 넌 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어.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