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by 강석우


장르: 드라마, 스포츠, 바둑, 시대극

감독: 김형주

출연: 조훈현(이병헌), 이창호(유아인), 정미화(문정희)


시놉시스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국내 최초 우승자가 된 조훈현. 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그는 바둑 신동이라 불리는 이창호를 제자로 맞는다.

“실전에선 기세가 8할이야” 제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먹고 자며 가르친 지 수년. 모두가 스승의 뻔한 승리를 예상했던 첫 사제 대결에서 조훈현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세를 탄 제자에게 충격적으로 패한다. 오랜만에 패배를 맛본 조훈현과 이제 승부의 맛을 알게 된 이창호.

조훈현은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을 되살리며 다시 한번 올라갈 결심을 하게 되는데...


아들과 같이 본 영화이다. 소감을 나눴는데, 아들의 소감이 나보다 백 배는 나은 것 같아 아들의 소감록 전문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승부> 감상문 –강해밝-


원래 관심이 가던 주제의 영화였다. 바둑은 잘 모르지만, 어느 분야에 대입해도 참 흥미로운 소재다. 세계를 호령하던 스승을 어린 나이에, 그것도 전혀 다른 기풍으로 이겨버린 것이니까. 이창호의 그 유명한 ‘상하이 대첩’이나,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이후 그 스승의 기풍이 현대 인공지능의 기풍과 가장 유사하다는 얘기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창호가 처음 프로에 입단해서 ‘국수’인 스승을 이기는 얘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 각색이 있겠지만, 더없이 흥미로운 소재라 기대하며 보기 시작했다.

사제지간을 다룬 영화답게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모든 순간이 인상 깊은 장면이었고, 기억할 만한 대사가 나왔던 것 같다. 서봉수를 모티브로 만든 남기철이 나온 장면들도 어쩌면 조훈현과 이창호 모두에게 스승인 것만 같은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처음엔 자신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정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누구보다 호전적인 기풍을 가진 스승에게 배우며 자랐음에도 이창호는 결국 자신만의 확고한 기풍을 만들어냈다. 스승의 바둑을 배우지 못할 것 같아 낙담한 이창호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 이기겠다고 생각하라고 한 남기철의 조언은 누구보다 날카로운 창인 조훈현의 제자를 누구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기세에 밀려 제 실력을 못 내는 제자에게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을 떠올려보라는 조훈현의 조언은 그 단단함이 흔들리지 않게 해 줬다. 이렇게 훗날 ‘돌부처’라고도 불렸던 이창호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잘 드러난 초반부였다. 국수의 제자로서 느끼는 압박감, 스승과 다른 기풍에 대한 의구심,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승부욕과 자신만의 바둑을 만들어 나가는 야망까지, 이 모든 감정에 정말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이창호가 가진 그 기개가 부러웠다.


초반부에는 이창호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흥미진진하고 흐뭇하게 봤다면, 중반부에는 서로 적수가 된 스승과 제자가 느끼는 압박감을 모두 느끼느라 숨이 막혔다. 자신의 대국도 잊고 이창호의 바둑을 궁금해하던 조훈현처럼 웃으며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사이에 낀 조훈현의 아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봤다. 어린 나이에 스승을 이긴 제자, 전성기에 제자에게 진 스승, 이창호가 조금 더 서서히 성장하며 스승의 자리를 조금씩 넘겨받았다면 모두 흐뭇하게 웃었겠지만, 이때는 둘 다 마음이 좋지 못한 시점이었다. 못난 스승 둬서 이겼는데 마음껏 웃지도 못한다는 자족적인 말이 참 아프게 와닿았다. 사제간에 서로 갖는 미안함을 정말 잘 나타낸 것 같다. 상대가 누구든 이기려는 것이 프로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한집에 같이 살며 배우고 가르치던 사이에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쉬울 리가 있을까. 너는 늘 내 자부심이었다는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을 끝으로 집에서 떠나보낼 때의 심정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이었어도, 나는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 같다.


영화의 후반부는 생각보다 짧다. 아마 방황을 멈추고 다시 자신의 바둑으로 최정상에 돌아오는 과정을 자세히 담아내면 너무 길어지거나 흐름을 잇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원래 최정상에 있던 사람인지라 과거를 되새기며 다음을 다잡으니 다시 실력이 돌아오는 장면이 납득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처럼 바둑을 모르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오히려 최선의 결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의 바둑을 찾으라고 했더니 정상에 오른 제자처럼 자신의 바둑으로 돌아가 정상에서 마주하는 것은 참 낭만 있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더 맘에 들고 보기 좋았던 것은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이 압박감이 아니라 여유와 흐뭇함이 보였다는 것이다. 이창호에게 지고 좌절했던 조훈현이 그의 말마따나 ‘못난 스승’이었다면, 제자에게 도전하면서도 겸손함과 여유를 가진 그는 ‘잘난 스승’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실제로는 이창호가 결승에서 바로 조훈현을 이긴 것은 아니고, 둘이 기풍을 가지고 싸운 적은 없다는 등 각색된 부분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각색이 ‘사제지간의 대결’이라는 소재와 그로 인해 나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 적절한 영화적 장치였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일화를 잘 모르고, 바둑을 잘 모르더라도 보기 좋은 영화였다. 특히 각자가 느끼는 감정을 진하게 전달해 주는 배우들의 열연은 정말 최고였다. 그 덕분에 이 영화에 나오는 여러 생각과 조언으로부터 나도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막상 하고 보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은 일도 하기 전엔 그래도 되나 하며 망설여지고, 이제 좀 알겠다 싶다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견디고 하다 보면 이기더라.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 꼭 바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테니, 나도 답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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