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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현 Feb 05. 2023

생존 모드 해제

장기 치료가 필요한 갱년기 건강 이슈가 있어 관련 분야 전문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 홈페이지의 의사 목록에서 사진을 보고 인상이 좋은 분을 선택했는데, 만나보니 자상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70대 의사였다. 지금까지 만나본 의사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느긋하게 진료하는 의사였고, 그 태도와 분위기 만으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직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 더 이룰 것이 없고, 더 자신을 증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사람, 생존 모드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느껴지는 여유와 편안함이었다. 잘 보호받는 기분, 좋은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생존 모드가 해제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낯설다. 또 한 사람, 이렇게 생존 강박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경험이 떠올랐다. 몇 해전 이사하고 나서 이래저래 처리할 일이 많아 예민해져 있을 때 만난 70대 인테리어 사장님. 전화로 이분 목소리만 들어도 웬일인지 조급하고 예민한 마음이 진정되었다. 친절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자기가 하는 일과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신뢰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여유 같은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이 분이 자기 직원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직원들이 사장을 믿고 따르는 분위기였다.  


내가 만난 두 분은 해당 분야에서 오랜 경험과 지식이 쌓인 70대 남성이다. 공적 영역에 입장하고 생존하는 것이 허락되는 남성 중에서 이런 분들이 꽤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이 생존 모드에서 벗어나는 조건이 너무 예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동이건, 청소년이건, 청년이건, 중년이건 모두 생존 모드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예외적일 수밖에 없다. 생존 모드가 해제된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를 더 많이, 자주 만나고 싶다. 불안과 생존 강박이 예외인 사회에서 살아보고 싶다. 모두가 생존 모드로 살아가는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생존 모드인 사회에서는 출산, 양육, 돌봄은 일부에게만 가능한 예외일 수밖에 없다. 한국 인류의 멸망은 이런 방식으로도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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