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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Jan 29. 2023

'잃어버린 나'를 기억하기

유리 슐레비츠의 ⟪비밀의 방⟫에 대한 개인적 단상

내가 율리 슐레비츠의 그림책 ⟪비밀의 방⟫(시공주니어, 강무홍 옮김)을 읽은 것은 몇 년 전이었다. 단순한 그림과 단순한 스토리를 지닌 ⟪비밀의 방⟫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마도 내 삶이 지닌 문제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얼마 전까지 이십 년 가까이 한집에서 죽 살았다. 같은 집에 오랫동안 살다 보니, 책, 옷가지, 잡동사니가 점점 많아져서, 내가 사물을 지배하는지 사물이 나를 지배하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릴 때부터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는 했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생기면서부터 책 욕심은 나날이 심해졌다. 한때는 책을 매일 구매하다시피 해서, 택배가 오지 않는 날에는 마음이 허전하고 일종의 금단 현상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도서 구입비도 엄청났지만, 집안에 책을 둘만한 공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수많은 책이 거실과 서재의 책장에 이중 삼중으로 쌓여있거나 바닥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조만간 호더가 될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한 시절에 ⟪비밀의 방⟫을 읽어서인지, 그 그림책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비밀의 방⟫은 독립성을 지닌 두 유형의 유대 설화를 하나의 옛이야기로 결합한 그림책이다. 주인공이 어떻게 임금의 보물창고를 관리하게 되었는지를 다룬 전반부는 ⟨황제의 얼굴들⟩이라는 유대 설화 유형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주인공이 우두머리 대신의 모함을 받는 사건을 다룬 후반부는 ⟨기억을 위한 물건⟩이라는 유대 설화 유형에서 빌려온 것이다. 나는 ⟪비밀의 방⟫의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마음에 든다.

⟪비밀의 방⟫의 결말 부분

⟪비밀의 방⟫의 후반부에서 시기심에 사로잡힌 우두머리 대신은 주인공을 내쫓기 위해서 임금과 함께 주인공의 집을 갑자기 방문한다. 우두머리 대신은 ‘비밀의 방’에 횡령한 보물이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하지만 막상 방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주인공이 오래전에 사용했던 나뭇등걸과 낡은 지팡이만이 있었다. 사막에서 궁핍하게 살았던 주인공은 궁궐에 들어와서 명예와 부를 누리게 되면서 자기가 예전과는 다른 인물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날마다 텅 빈 ‘비밀의 방’에 혼자 들어와서 과거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옛이야기를 활용한 그림책이나 영화를 접하면,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인지, 나는 그 저본이나 근원 설화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힌다. 율리 슐레비츠의 이야기는 전통 설화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기억을 위한 물건⟩ 유형의 설화들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여러 각편 가운데 내 마음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핀하스 사데흐(Pinhas Sadeh)가 편찬한 ⟪유대 민담⟫(Jewish Folktales)에 수록된 ⟨유대인 양치기⟩라는 이야기이다.


   사막에서 사냥하던 어느 왕이 피리 소리를 듣는다.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따라가던 왕은 어느 언덕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유대인 양치기가 홀로 앉아서 피리를 불고 있었다. 왕은 양치기가 마음에 들어서 자신과 함께 떠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양치기는 왕을 따라갔고 왕실 보물을 관리하는 대신이 되었다.  

   왕의 대신들은 새로 임명된 유대인이 유능한 일솜씨로 총애받자 시기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합심해서 모함하기로 하였다. 왕에게 “폐하의 유대인이 공금을 횡령하고 세금을 착복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왕은 화가 나서 회계감사관에게 명령해서 유대인의 은행 계좌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해서, 대신과 경찰을 여럿 거느리고 유대인 집을 급습했다.

   유대인의 집에는 싸구려 가구만이 놓여 있었을 뿐이었지만, 이상스럽게도 방문 하나가 잠겨 있었다. 왕이 하인들에게 그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주인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이어서 자신들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신들은 “이 방이 바로 훔친 보물을 숨긴 곳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의 명령으로 사람들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더니, 방에는 양치기 지팡이, 낡은 배낭, 피리만이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무척 놀랐다. 왕이 왜 방안에 그러한 물건들을 넣어둔 것이냐고 물어보자, 유대인이 대답했다. “폐하,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대신이 되었을 때, 저는 이 방에 양치기 시절에 쓰던 물건들을 넣어두었습니다.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이 방에 들어와서 피리를 불면서, 한때는 제가 사막에서 으스댈 줄 모르면서 순박하게 살았던 양치기였음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양치기가 홀로 명상에 잠겨 피리를 부는 ‘텅 빈 방’의 아름다움과 충만함을 상상하자, 내 삶의 공간이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 근교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과 앞으로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을 과감하게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서고를 정리할 때, 미국 유학 시절에 구입했던 책들을 살펴보았더니, 백여 권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그 책들 가운데 절반은 새것이 아니라 중고 책이었다. 궁핍했던 유학 시절, 나는 새 책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다. 아들을 위한 그림책과 나를 위한 CD는 거의 모두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학위 논문을 쓰는 데 필요한 책들은 대부분 인근 대학 및 공공 도서관을 전전하면서 대출하거나 복사해서 읽었다. 도서관까지 발품을 파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던 듯싶다.


어쩌면, 학위를 끝마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책을 무절제하게 사들인 것은 유학 시절 사고 싶었던 책을 살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나 한풀이였는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책을 사야겠다는 욕망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수천 권의 책들을 정리하면서, 밑줄 한 줄 긋지 않고 곱게 사용한 책들을 기증할 도서관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국공립도서관이나 공익재단들은 발행 연도가 5년 또는 10년이 지난 책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도서 쇼핑 중독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소유한 책들은 그야말로 나에게만 쓸모가 있을 뿐인데, 나조차 그 책들의 가치와 매력을 제대로 알기에는 삶이 너무도 유한하다.


유학 시절을 다시금 떠올리니, 책을 소유하는 대신 책을 공유하였던 그때의 삶이 더 풍요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옛 습관을 조금씩 되찾고 보니, 도서관 발품 팔이의 장점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도서관까지 자주 걷는 일이 생각보다는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책바다 서비스⟩를 통해 전국 대학 도서관이 소장한 외국어 원서를 빌려서 볼 수 있어서, 구태여 아마존에서 도서를 구입할 필요가 없다. 내가 사는 시의 공공도서관 전체가 소장한 인문서나 전공서가 생각보다는 많은 편이어서, 이삼일 안에 빌려볼 수 있는 ⟨책두레 서비스⟩도 쓸모가 컸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스캔하거나 복사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책더미와 씨름하는 고통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 글을 마치려 하니, 새삼 어린이 책방을 하는 내 친구와 그림책 작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전대미문의 출판 시장 빙하기에 신음하는 벗들과 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세월이 흘러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책들,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그림책들은, 아무래도 앞으로도 계속 사야 할 것 같다. 아직은 아름다운 그림책이 주는 색감과 질감의 유혹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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