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인간이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삶의 지혜가 더욱 풍부해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보니, 나이와 지혜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와 어머니가 작년과 재작년에 암으로 돌아가시고, 제법 큰 교통사고를 체험해서인지 삶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지난 몇 년간,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악몽을 꾸다가 밤에 여러 번 일어나곤 한다. 그런 밤에는 가족에 대한 걱정, 앞날에 대한 불안감,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러한 밤이면 나는 옛이야기를 공부한다. 옛이야기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고 공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불안감은 내 마음에서 시나브로 사라진다.
내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듯한 16세기 유럽에서 전승된 옛이야기가 내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옛이야기 연구서에서 만난 짧은 이야기가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나는 키드르와 모세에 관한 옛이야기를 떠올린다. 코란(꾸란) 18장에 서술된, 모세와 키드르(또는 히드르, Khidr)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행과 불행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두 바다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모세는 알라신이 은혜를 베풀어 주고 지식을 전수해 준 성자인 키드르를 만난다. 모세는 키드르에게 그를 따라다니면서 지식을 배우고 싶다고 간청한다. 하지만 키드르는 모세가 자신을 인내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키드르를 거역하지 않고 인내하겠다고 말한다. 키드르는 함께 가고 싶다면 자신이 설명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에 올라탔는데, 키드르가 배에 구멍을 뚫었다. 그 모습을 본 모세는 “배에 탄 사람들을 익사시키려고 합니까.”라고 비난했다. 키드르는 그러길래 자신이 모세에게 인내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대꾸했다. 그래서 모세는 약속을 잊어서 그런 것이니 나무라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 둘은 함께 길을 가다가 어떤 소년을 만났는데 키드르가 그를 죽였다. 모세는 “당신은 죄 없는 사람을 살해했으니 실로 사악한 일을 하였습니다.”라고 비난했다. 키드르는 그러길래 자신이 인내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대꾸했다. 그래서 모세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다시 또 묻는다면 자신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여행을 계속하다가 어떤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했지만 모두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기를 거절했다. 그 마을을 지나다가 두 사람은 막 무너지려는 담을 보았다. 키드르가 그 담을 똑바로 세워놓으니 모세가 마을 사람들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그러자, 키드르는 이제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모세에게 왜 자기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한다.
배에 구멍을 뚫은 것은 배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인데 부자 왕이 그것을 뺏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고, 소년을 죽인 것은 그가 믿음이 깊은 부모에게 거역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키드르가 담을 보수한 것은 그것이 그 마을의 가난한 두 고아의 것인데 그 밑에 보물이 숨겨져 있어서라고 말한다. 두 고아의 아버지가 의로운 사람이어서 하나님께서 아이들이 성년에 이르렀을 때 보물을 꺼낼 수 있기를 원하신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에서 키드르는 모세의 시각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세 가지 행위--호의를 베푼 사람들의 배에 구멍 뚫기, 길 가던 소년 살해하기, 호의를 베풀지 않은 사람들의 담을 보수 하기—를 한다. 이 세 가지 행위 가운데 두 번째 것은 키드르의 설명을 듣고도 나로서는 그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도 내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불교도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인생사의 행과 불행, 선과 악, 절대자의 뜻을 인간의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헤아리지 말라는 메시지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삶을 되돌아보면, 체험할 당시에는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시간이 흐른 후 행운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또한, 그 반대로,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사건이 나중에는 불행의 씨앗임을 깨달을 때도 있다.
칼 융을 비롯한 많은 분석심리학자는 코란 18장에 등장하는 키드르와 모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데, 그것은 키드르가 우리 무의식에 존재하는 자기를, 모세가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키드르의 상징성에 대해서 폰 프란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Selbst의 놀랄 만한, 상위의 지혜를 상징한다. 우리의 합리적 의식은 결코 이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의 자아는 이보다 높은 내적인 진실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비난한다. 그것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요소들을 알고 이들을 고려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아에게 하나의 뒤얽힌, 대단한 우회로처럼 보인다.” ⟨태모와 전체성⟩ ⟪민담 속의 그림자와 악⟫, 한국융연구원, 146.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키드르와 같이 삶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잠재되어 있는데,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아 또는 의식으로 인해 그러한 지혜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가족과 벗들이 자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것을 볼 때, 착하고 성실하고 올곧은 사람들이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오래 사는 것을 볼 때,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 이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러한 막막함이 내 마음속에 밀려들 때면,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기 싫어서, 키드르와 모세의 이야기나 새옹지마를 떠올린다. 인생사의 옳고 그름과 행과 불행을 쉽사리 단정 짓지는 말자고, 인생사에는 내 단순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오묘한 섭리가 내재되어 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나 자신을 추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