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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r 31. 2022

경순왕의 무덤은 왜 연천에 있을까

패망의 왕 2

패망(亡)의 왕, 그러나 망(忘) 하지 않은.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 기슭에는 신라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경천묘(敬天廟)가 있습니다. 귀한 분(경순왕)이 오셨다 하여 지금껏 귀래(貴來) 면이라 부른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유래를 가진 유서 깊은 마을이라 하겠습니다.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한 후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강원도 원주의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경순왕이 돌아가시자 왕을 추존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다지요. 그러나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 조선 초 중수되고 또다시 화재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조선 영조 13년(1737)에 이르러 재건되었고 경천묘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경천묘는 소실되어 버렸고 18세기 말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경순왕의 영정을 2006년 다시 제작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경순왕을 모신 경천묘 전경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미륵산 기슭의 경천묘를 들른 뒤 경순왕이 조성했다는 미륵산 정상의 주포리 미륵불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합니다. 미륵산은 689m로 강원도의 웬만한 이름난 산들에 비하면 아담(?)한 편에 속하지만, 기암괴석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져 있어 로프나 나무 계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오르기 어렵습니다. 신라 경애왕 연간에 창건되었다는 황산사 절터를 홀로 지키는 아담한 주포리 삼층석탑을 지나고, 점점 가팔라지는 산길을 오르자면 덩달아 숨소리도 거칠어집니다.


정상에 이르기 직전 시원한 바람이 느껴질 즈음, 어느 듯 사방이 뻥 뚫리고 고운 능선이 수묵화처럼 펼쳐집니다. 아래로는 귀래면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입니다. 이렇게 전망이 좋은 산이라니요! 정상에서 저 멀리 북서쪽 방향으로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가 위치한 용문산이 존재를 드러냅니다. 경순왕의 큰 아들 마의태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 들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입니다. 그때 태자가 심었다는 나무가 바로 1,100살 먹은 용문사 은행나무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명산을 다 두고 경순왕이 왜 하필 미륵산으로 왔는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나라를 내어주고 목숨을 부지했지만 끝까지 투항에 반대하다 속세를 등진 아들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한 아버지로서의 경순왕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회한과 부정(父情)이 그를 이곳 미륵산까지 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길쭉한 모양의 주포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 - 해가 잘 들지 않아 지붕돌마다 이끼를 이고 있다.
미륵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다본 귀래면 - 아래쪽 평평한 바위가 미륵불이 새겨진 거대한 암벽의 꼭대기이다.


그리고는 눈앞에 우리를 갸륵하게 내려다보는 거대한 미륵불이 짠~하고 나타납니다. 사각형에 가까운 넙적하고 편편한 돋을새김 한 얼굴인데, 마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하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경주 남산의 그 흔한 미남형 마애불은 아니지만 누구도 밀어낼 것 같지 않은, 그래서 뭐든 털어놓고 싶어지는 수더분한 얼굴로 사람을 반깁니다. 경순왕의 딸이 아버지를 위해 조성한 불상으로 이 미륵불이 경순왕의 얼굴이라 전해져오기도 합니다.

주포리 미륵불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미륵산 정상 부근에 새겨진 10m 높이의 거대한 불상으로 토속화 되어가는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짐작된다.


원주 미륵산의 경천묘 외에도 경순왕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은 더 있습니다. 조선말 고종 때(1902년) 경남 하동군의 유림들이 세운 경천묘와 고종이 편액을 내린 경주 숭혜전(崇惠殿)이 그곳입니다. 숭혜전은 원래 경순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월성에 사당을 짓고 제향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인조 대에 새로 짓고 정조 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습니다. 고종 대에 이르러 13대 미추왕, 30대 문무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는데 이때 고종이 숭혜전이라는 편액을 내려 지금도 매년 봄, 가을로 향대제를 지냅니다.            

숭혜전 전경 – 경북 경주시 황남동


경순왕은 고려 경종 3년(978) 개경에서 세상을 떠나 경순(敬順)이란 시호를 받고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 인근 언덕에 묻혔습니다. 신라 56명의 왕 중에서 능이 경주를 벗어나 있는 왕은 그가 유일합니다. 그는 왜 경주도 개경도 아닌 연천에 묻혔을까요?


경순왕의 장례를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치르게 되면 민심이 동요되어 반란이 일어나기 딱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경주로 향하는 경순왕의 상여를 고려 왕조가 의도적으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임진강 건너편의 개경과 거의 수평선 상에 위치해 있으며 거리상으로 30km로 가까운 거리이면서 수운 교통이 편리한 임진강 고랑포 근처에 능을 세우게 했다는 설이 일반적입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경순왕의 무덤은 잊혔고 조선 영조 23년(1747)에 이르러 묘비가 발견됨으로써 왕릉으로 재정비하게 됩니다.

경순왕릉을 발견하고 재정비한 일, 그리고 앞서 본 원주 귀래면에 있던 경순왕의 영정각에 경천묘라는 이름을 내린 일 등이 하필이면 왜 모두 영조 때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당시 경주 김 씨가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노론의 주요 가문으로 부흥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영조가 가장 사랑한 딸 화순옹주의 남편이 경주 김 씨 김한신이고 그의 8촌 형제인 김한구의 장녀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 씨입니다.  

        

연천 경순왕릉의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임진강 하구 고랑포지만 지금은 남방한계선 바로 아래 최전방지역이라 오가는 이가 많지 않기에 스산한 느낌마저 듭니다. 6.25 전쟁 전에는 장단군(長湍郡)이었으나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연천군이 된 장남면 고랑포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경순왕릉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미리 신고하고 허락받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능 뒤로 철책이 단단히 처져있고 곳곳에 ‘지뢰’라고 쓰인 으스스한 표지판이 달려 있어 이곳이 북한과의 최접경지역임을 알려줍니다.


경순왕릉은 능이 재정비된 조선 후기의 왕릉 조성 양식을 따르고 있어 경주의 수두룩한 대형 왕릉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고려 공양왕릉이 받고 있는 푸대접에 비하면 무척 번듯해 보입니다. 일족이 몰살당한 공양왕과는 달리 후손의 돌봄이 미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경순왕릉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


그렇다면 공양왕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요? 현재 공양왕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입니다. 한 사람의 무덤이 두 개라니 희한한 일입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공양왕의 유족 및 조선 왕조가 인정한 무덤은 고양시의 무덤입니다. 삼척의 무덤은 처음 살해되어 묻힌 곳이고, 조선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올린 후 다시 묻은 곳이 경기도 고양시의 무덤이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공양왕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무엇 하나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중 고양시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공양왕이 삼척에 유배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고양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때 피신했던 고개를 ‘대궐 고개’, 그때 마신 샘물이 ‘대궐 고개 약수터 샘물’, 골짜기에 숨은 공양왕에게 몇 차례 밥을 가져다주었던 스님들이 어느 날 시신으로 발견된 공양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 고을을 ‘밥골’이라 부르다 현재의 ‘식사동’이 되었다는 설까지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지명과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이 납니다. 진위 여부를 떠나 500년이란 긴 시간을 지켜온 한 왕조의 몰락과 마지막 왕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백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요? 그것이 전 왕조를 애도하는 백성들만의 방식이었을 테니까요.                    

고려 공양왕과 순비 노 씨의 쌍분-  왕릉이라고는 하나 규모나 형식면에서 매우 초라하다. 고개 숙인 석물에 눈길이 간다.


경순왕릉으로 오르는 길에 꽃망울을 터트린 벚꽃 잎이 사소한 바람도 이기지 못하고 휘리릭 휘리릭 흩어집니다. 비록 투항 후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패망의 왕으로서 어찌 한이 없었을까요? 죽어서도 자신의 나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슬픔을 달래주려는 듯 분홍 꽃잎이 눈꽃처럼 처연하게 날리는 봄날입니다.   

경순왕릉 오르는 길에 벚꽃이 속절없이 흐드러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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