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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Mar 15. 2022

패망(亡)의 왕, 그러나 망(忘) 하지 않은.

패망의 왕 1

태자(마의태자):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의사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하다가 힘이 다하면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경순왕: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존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신라 경순왕 영정입니다.(문화재청 제공)


이는 『삼국사기』 935년(경순왕 9년) 10월의 기사로, 고려에 항복하는 것에 반대하는 태자와 항복할 뜻을 밝히는 경순왕(敬順王, 미상~978, 재위 927~935)의 대화입니다. 결국 경순왕은 시랑 김봉휴를 개경에 보내 고려 조정에 입조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그 해 11월 3일 백관을 거느리고 수도 금성(지금의 경주)에서 출발합니다. 화려하게 장식한 아름다운 수레와 보물을 실은 말이 30여 리(약 12km)에 이어졌고 구경 나온 이들이 담을 두른 것처럼 많았다고 합니다. 이미 고려에 편입된 고을들은 이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고 『고려사』는 전합니다. 같은 달 12일 경순왕이 개경에 도착하자 왕건은 의장을 갖추고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고 위로하였으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거처 한 곳을 주어 묵도록 하였습니다. 경순왕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혼인, 왕건의 사위가 되었고 12월 12일에는 공식적으로 왕건이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임으로써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경순왕은 정승공(正承公)에 봉해졌는데 녹 일천 석과 경주를 식읍으로 받고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이 되었습니다. 이는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됩니다.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태조 왕건의 손자인 5대 경종과 혼인한 헌숙왕후(獻肅王后) 김 씨로 경종은 그를 장인으로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보다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녹봉과 식읍을 더해주었습니다. 경순왕은 신라가 멸망한 지 43년 만인 978년(경종 3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출생 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정황상 최소한 80여 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패망한 나라의 왕으로써 귀화인의 예우를 받으며 여생을 평화로이 보낼 수 있었던 왕은 드뭅니다. 경순왕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은 나라가 망했지만 새로운 왕조, 즉 고려 500년 동안 매우 중요한 가문으로 자리 잡았고 많은 자손을 남겼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명문가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주 김 씨는 한민족(韓民族) 최대 규모의 성씨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 씨 가문이 조선 건국과 함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거의 멸족에 이르게 된 것과 비교한다면 이는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먼저 고려 태조 왕건의 겸손하고 의(義)를 갖춘 리더십에 눈이 갑니다. 통일 후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던 신라는 후대로 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잦은 왕위 다툼으로 점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10세기에 이르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바로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송악(지금의 개성)에 후 고구려를 세운 궁예입니다. 지배력이 약화된 신라와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후삼국 간의 각축이 전개되고 바로 이 시기 송악의 호족 출신 왕건이 등장합니다. 그는 폭정으로 신임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왕좌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했습니다.      


그는 궁예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대신들이 비밀리에 찾아와 쿠데타를 제안했을 때 여러 번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수와도 같았던 후백제의 견훤이 투항해오고, 마침내 신라 경순왕이 항복해 왔을 때에도 한 결 같은 포용과 겸양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적이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며 찾아와 항복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합니다. 평생을 솔선수범해 전쟁터에서 보낸 그였지만 최후의 순간은 늘 신중하고 정의로웠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신숭겸 장군을 공산전투에서 잃었을 때 그는 견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막상 견훤이 투항했을 때 자신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다 하여 상보(尙父) 어르신이라 부르며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양주를 식읍으로 내리고 비단, 노비, 말 등을 하사하였으니 매우 파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그의 유화정책은 정통성과 민심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의 겸손하고 의로운 리더십은 유독 빛을 발하며 교훈을 줍니다.     


경순왕이 귀화인의 예우를 받으며 비교적 평화로운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경순왕의 시의적절한 항복입니다.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을 경주 포석정에서 사로잡아 자결토록 한 후백제의 견훤은 경애왕의 이종사촌이자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의 후손인 김부(金傅, 후일 경순왕)를 왕으로 추대하고 돌아갑니다. 자신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경순왕은 신라를 무력으로 집어삼키려 한 난폭한 견훤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935년 6월 견훤이 아들인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혔다가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실익이 없음을 간파한 그는 군신 회의를 열어 일부 신하들과 태자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투항을 결정합니다. 그나마 신라 왕실이 가장 가치가 높은 시점을 골라 투항한 것이지요. 사실 견훤처럼 강제로 신라를 밀어버리려 하진 않았지만 왕건은 이미 경순왕을 경계해 강릉 쪽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고려 부대를 주둔시키는가 하면 경주 바로 위 일어진(경상북도 포항지역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직접 행차해 성을 쌓기도 하였으니 은연중에 항복하라는 압력을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셈입니다. 왕건이 유화적인 정책만을 편 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견훤의 계속된 침공으로 국가의 존립이 흔들리면서 신라의 장군과 관리들이 잇달아 고려에 이미 투항한 상황이었습니다. 경순왕이 투항을 결심한 데에는 이런 여러 상황들이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의적절함을 놓쳐버려 사직을 보존하지 못한 것은 물론 자신과 가솔, 나아가 왕족 가문 전체가 몰살로 내몰린 비운의 ‘마지막 왕’도 있습니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왕, 제34대 공양왕(恭讓王, 1345~1394, 재위 1389~1392)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제32대 우왕 즉위 당시에 이미 고려를 쥐고 흔들만한 막강한 군사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원한 것은 보기 좋은 선양(禪讓)이었기에 정통성을 가진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하고 왕족 직계와는 거리가 먼 방계 왕족, 왕요(후일 공양왕)를 선위의 도구로 쓰고자 옹립합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희망과 달리 공양왕은 이색, 정몽주 등 반 이성계파와 손잡고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왕조를 지켜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공양왕은 결국 1392년 왕대비 안 씨의 이름으로 내려진 폐위의 교지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금왕(今王)은 멍청하고 어두워 군도(君道)는 사라졌고 인심은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사직과 생령의 주(社稷生靈主)가 될 수 없으니 부디 폐하여 주십시오.     

『고려사』 공양왕 세가 中, 왕대비 안 씨에게 올린 배극렴의 상서 中.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간성군(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그의 두 아들과 함께 강원도 삼척 궁촌리로 재차 유배됩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1394년 4월, 결국 고돌산 살해재(지금의 삼척시 원덕읍 동막리와 근덕면 궁촌리로 가는 고개로 공양왕이 살해된 곳이라 해서 붙어진 이름)에서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고 마는데요, 그것은 고려 왕실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자꾸 일어나고 왕 씨 왕족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였기에 취해진 조처였습니다.

공양왕의 처형과 함께 새로운 왕조는 고려 왕족에 대한 대 몰살을 계획합니다. 우선 강화와 거제 등지로 귀양을 보낸 후 종국에는 모조리 살해했습니다. 하사 받아 왕 씨가 된 사람들은 모두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게 하였고, 왕실의 후예가 아닌 왕 씨들은 모두 외가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는데, 이때 왕 씨들이 전(全)씨, 옥(玉)씨, 주(主)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숨어 지내던 왕족의 후예들로 명맥을 유지한 왕 씨는 현재 대한민국에 2015년 기준 2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급변하는 사태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으로 옹립된 두 사람이지만 공양왕과 그의 일족들이 받은 대우는 너무나 참혹하여 경순왕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경순왕이 투항 후 대체로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큰 오명을 남기지 않은 이유로 또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글의 서두에 태자와의 대화에서도 보았듯이 경순왕이 항복을 결심할 때 무의미한 저항으로 백성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의지를 피력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이미 망조가 든 신라가 경순왕의 책임은 아니었다는 점과 맞물려 백성들 사이에서는 애민(愛民)의 왕으로 칭송까지 받게 되니 천 년의 사직을 가벼이 넘겨버린 무책임한 왕이라는 비난을 피한 것은 물론 백성을 살린 신(神)으로까지 받들어집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395~1453)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e Ⅺ Palaiologos, 1405~1453, 재위:1449~1453)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의 공성전에 맞서 두 달간 처절하게 대항했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로 잘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오스만의 공성포에 뚫리며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메흐메트 2세 측에서는 항복하면 황제 및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이때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나뿐 아니라 여기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라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하루 전날인 1453년 5월 28일, 그리스인 지휘관에게 한 연설에서는,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나 또한 도시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중략)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수 천 명 병사들과 그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황제 자신도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여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패배와 망국의 왕이 되었지만 그가 콘스탄티노플을 되찾는 날 부활할 것이란 전설과 함께 지금까지 그리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의 영웅 중 하나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그는 2009년 그리스 최대 방송인 ‘스카이 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28위에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역대 군주 중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56~323)과 레오니다스 1세(B.C 5세기 페르시아 전쟁 중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스파르타의 왕) 다음가는 3위의 인기라고 합니다.                   


후대에 그려진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성상(icon)과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순간입니다. (터키 '파노라마 1453박물관' 제공)
낡고 여기저기 무너져내린 테오도시우스성벽 아래 서니 사투를 벌인 비잔틴제국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재미있게도 경순왕과 콘스탄티누스 11세, 두 왕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 사람 다 적의 수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순왕은 신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 역시 맏형이 죽고 동생과 제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을 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1404~1451,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흐메트 2세의 아버지)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탐내던 무라트 2세는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즉위하기 전에도 여러 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던 인물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과거 매우 번영했던 두 나라였지만 더 이상 일말의 희망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라는 경순왕 대에 이르러 수도인 금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잃고 모든 것이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동로마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즉위할 당시 동로마제국은 이미 광대했던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만 겨우 남은 도시국가로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이미 주변의 대부분의 영토는 오스만 제국에게 장악당한 상황이었기에 다시 부흥할 가망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왕은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찬란했던 천 년의 제국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부담감과 죄책감으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슷한 상황에 처한 그들이지만 두 왕은 완전히 다른 결정을 내립니다.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이 생명을 잃게 할 수는 없다며 투항합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투항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백성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선택이 옳았을까요? 누구의 선택이 더 가치 있는 것이었을까요?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한 각자의 시대와 사회 속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을 떠나 역사상 한 나라의 군주가 내린 판단과 결정은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처참하게 희생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숭고하고 존귀하며 보편의 가치를 지닌 그 무엇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민족적 자존감이든, 종교적 신념이든 간에 말이지요. 완전히 다른 결정을 내린 두 왕이지만, 백성의 무고한 희생을 차마 볼 수 없다며 투항한 경순왕은 애민의 왕이 되었고, 백성과 끝까지 싸우다 죽은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민족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비난과 치욕의 이름을 얻기보다 백성의 칭송을 받으며 지금도 추앙받고 있으니 그들은 분명 자신의 임무와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경순왕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요? 뜻밖의 장소입니다. 다음 글로 이어지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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