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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an 31. 2022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땐 춘당지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창경궁 4

 아내는 많아도 여인 복은 없었던 중종 (brunch.co.kr)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월대를 쌓아 격을 높인 중궁전, 통명전(通明殿)


이토록 아름다운 통명전의 소름 돋는 이야기.


경춘전과 환경전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왕비의 침전(중궁전)인 통명전으로 향합니다. 중전이 머물던 우아하고도 위엄 있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통명전은 내전의 대부분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순조 연간의 대화재 직후 새롭게 건립되었습니다. 현판은 순조 임금의 어필에 금박 처리가 되어 있는데 글씨가 매우 크고 힘찹니다. 복제품이 걸려있고 보물로 지정된 진품은 내부에 걸어두었으니 안으로 들어가 꼭 감상해보아야겠습니다. 통명전 바로 옆의 아기자기한 연지에는 예전엔 물이 가득 차고 탐스러운 연꽃이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시름 많은 중전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테지요. 연지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창덕궁으로 연결됩니다. 현재 창경궁을 통해 창덕궁으로 입장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지요. 물론 일제에 의해 창경원이 되어 개장하기 전에는 두 궁궐 사이에 이렇게 높은 담장도 없었고 여러 문들을 통해 두 궁은 왕래가 용이했습니다.


통명전 내부에 걸린 순조 어필 현판


통명전 옆 아기자기한 연지(蓮池)


통명전 뒤뜰의 우물, 열천(冽泉)


통명전의 뒤뜰에 우물 하나가 보입니다. 놓치기 쉬운 장소이지요. 그 우물 위 돌담장에 차고 맑은 샘이란 뜻의 ‘冽泉(열천)’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나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생모였던 숙빈 최 씨가 이 우물의 물이 차고 시원하다고 말하자 영조가 우물에 직접 하사한 이름이라고 전해집니다. ‘열천’ 두 글자를 보면 영조의 효심이 느껴져 흐뭇해집니다. 창경궁에는 열천 외에도 9개의 우물이 더 있었습니다. 당시엔 궁궐을 지을 때 가장 먼저 우물 자리를 확보한 다음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물이 없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궁궐이라 한들 무용지물이겠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통명전에도 흑역사가 있습니다. 끔찍한 사건이었지요. 숙종 27년(1701) 중전에서 후궁으로 강등된 희빈 장 씨에게 사약이 내려집니다. 희빈 장 씨가 창경궁내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당시 인현왕후가 머물던 통명전 주변에 동물의 사체 등 흉물을 묻어둔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궁으로의 복위를 기도하면서 벌인 일들이 인현왕후가 죽은 뒤  밝혀지면서 희빈 장 씨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세자의 생모이기에 소론이 나서 극구 만류하였으나 희빈 장 씨와 그의 친정 식구들, 심지어 소론 대신들에게까지 일제히 사사 또는 귀양과 파면의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그 사건의 중심이 바로 이 통명전입니다. 참으로 냉정한 숙종입니다. 그토록 총애한 희빈 장 씨에게 사약까지 내렸으니 말입니다. 역시 사랑은 움직이는 것인가 봅니다.       

     

왕의 효심이 곳곳에 깃들다.     

                      

자경전 터에 지어진 일제강점기의 이왕가박물관 전경


통명전의 뒤쪽 언덕에는 효심 지극한 정조 임금이 즉위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위해 지은 건물인 자경전(慈慶殿)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경전은 고종 때 불타고 1911년 일제가 일본풍의 건물을 짓고 이왕가박물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왕실 도서를 보관한 장서각으로 계속 사용되었지만 1992년 창경궁 복원 과정에서 헐려나가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습니다


통명전 동쪽에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난간이 눈길을 끄는 건물이 양화당입니다. 통명전에서 생활하던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 수장들이 접대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던 인조가 환궁해 머문 곳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7일간 두문불출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라 불리는 삼전 나루의 항복을 한 임금으로서 참담했던 심정을 읽을 수가 있지요.                  


양화당의 동쪽으로 이어지는 두 건물이 영춘전과 집복헌입니다. 정조 임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두 건물입니다. 정조는 집복헌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아들 순조가 모두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집복헌은 후궁들의 처소로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 씨와 순조의 생모 수빈 박 씨 또한 이곳에 기거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집복헌 옆 영춘헌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이 소박한 장소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됩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땐 춘당지     


영춘헌과 집복헌을 마지막으로 내전 영역이 끝나면 이제 궁궐의 마지막 영역인 정원 건축 공간, 즉 후원(後園)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들의 휴식을 위한 정원입니다. 복잡한 정사로 몸과 마음이 피로해진 왕의 기운을 북돋워 주고,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싱그러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원래 비원(祕苑)으로 더 잘 알려진 아름다운 창덕궁의 후원과 연결되어 있었을 테지만, 지금 창경궁의 후원은 비원과는 별개의 공간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원의 풍경만큼은 어느 궁궐의 후원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의 춘당지(春塘池)


원래의 춘당지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연못이었습니다. 일제가 공원으로 만들 때 왕이 농사 체험을 하던 내농포를 헐어 더 큰 연못으로 만들고 뱃놀이를 즐기도록 하였습니다. 해방 후엔 춘당지 위로 케이블카까지 오갔다니 지금의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춘당지는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가을의 춘당지는 단풍이 곱기로 더욱 이름나 있습니다. 햇살에 영근 고운 빛깔이 사람들의 눈과 발걸음을 계속 잡아끕니다. 눈 덮인 춘당지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어느새 내 마음도 새하얗게 맑아집니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날의 춘당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 지치고 말의 칼날들이 나를 겨누고 있어서 어딘가로 숨고만 싶은 그런 날이었지요. 춘당지는 산뜻한 초록색이었고 차분하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힘든 마음 내려놓으라고 그래도 된다고... 결국 퐁당퐁당 연못에 내 고민 하나씩을 던져 놓고 일어섰습니다. 그 어느 날의 왕도, 왕비도 나처럼 이곳에서 위로받았겠지요.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을 위로한 나무와 물과 햇살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감성적인 공간이 바로 춘당지이고 창경궁입니다. 창경궁을 들어설 때 어깨를 누르던 내 소소한 일상의 고민이 이곳을 나설 때쯤이면 다 내려앉습니다. 더 이상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창경궁은 내게 그렇게 욕망을, 욕심을,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는 공간입니다.     


1909년 일제가 지은 식물원인 대온실은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양 최대의 온실이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철과 유리를 이용한 건물의 외관으로 화재가 되었던 건물의 건축학적 가치를 고려하여 보존키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희귀종 식물, 천연기념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출사(出寫)를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친김에 왕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관덕정까지 가보기를 추천합니다. 활쏘기 실력으로 사람의 덕을 본다는 의미의 집입니다. 글을 읽는 것만큼이나 무예를 중히 여긴 것이지요.

그렇다면 조선 왕들의 활쏘기 성적을 기록한 <어사고충첩>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낸 왕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정조입니다. 5발씩 10번을 쏘아 총 50발 중 49발이 명중했다는 기록이 10회 이상 등장합니다. 심지어 1발은 겸손의 미덕으로 일부러 딴 곳으로 쏘았다고 하니 활쏘기 실력만큼 큰 덕을 쌓은 왕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후원 영역을 마지막으로 창경궁 답사는 끝을 맺게 됩니다.      


왼쪽) 종묘~창경궁 원형복원공사 전 구름다리로 간신히 연결되어 있던 창경궁과 종묘,  오른쪽) 종묘~창경궁 원형복원 조감도 (출처: 서울시)


여전히 창경궁은 안팎으로 여기저기에서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창경궁에서 종묘를 잇는 복원공사가 한창입니다. 1931년 일제는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종묘와 창경궁을 의도적으로 단절하고 그 가운데로 율곡로를 통과시켰습니다. 이를 다시 원형대로 복원, 연결하려는 공사가 2010년에 시작해 2022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0년이 넘게 걸리는 대규모 공사입니다. 교통량이 많은 율곡로를 완전히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고심 끝에 채택된 지하 터널방식은, 원형 그대로의 복원은 아니지만 교통 혼잡은 막으면서도 창경궁과 종묘를 보행로로 연결시키는 복원의 모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19년 1월 1일부터는 창경궁 야간 상시 관람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에는 특별 관람 형태로 한시적으로만 진행되었는데, 이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습니다. 야간 개장 티켓이 암표로 팔리기까지 한다는 뉴스가 들려오기도 했으니까요. 이제는 월요일(휴궁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창경궁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취지로 개방한 숭례문을 개인의 화풀이 방화로 한순간에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창경궁 야간 개방 역시 좋은 취지를 빛나게 하려면 그에 합당한 문화재 보존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적이겠지요.      


역사는 과거 속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주인공들이 바뀌고 역사는 그들에 의해 계속해서 다시 쓰이고 있으니까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써가는 창경궁의 역사가 후대의 주인공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모범이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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