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東闕圖, 1820년대 후반 제작, 국보 제249호, 고려대·동아대박물관 소장)- 붉은 선 구역이 창경궁, 왼쪽은 창덕궁
숭문당을 빠져나와 드디어 생활건축 공간인 내전(內殿)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던 내전 영역은 창경궁의 원래 건립 목적에 맞게 오밀조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음을 ‘동궐도(東闕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나 지금은 워낙 많은 전각들이 사라져 버려 휑한 느낌을 줍니다.
매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함인정(涵仁亭) 지붕
매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 아름다운 함인정의 지붕
하지만 팔작지붕과 겹처마인 함인정 지붕 아래 서면 그 모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일시에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함인정의 지붕을 매의 날개라 부르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처마 선이 매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때의 유려한 모습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곡선이 하늘 위로 사뿐히 그려집니다. 극단적인 과장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중국 남쪽 지방 지붕의 곡률과도 다르고, 일본의 직선적인 지붕과도 차이가 큽니다. 자연에 가까운 선이고 겸손하고 부드럽지만 힘이 느껴지는 곡선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심리적 기질이고 감성이란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곳에서 영조가 과거에 급제한 이들을 불러 치하했다고 하니 건물로 인해 경사스러움이 배가 되었을 듯합니다.
이제 주로 왕실 여성들의 집으로 사용된 경춘전(慶春殿)과 왕이나 세자 같은 남성들의 주요 생활공간이었던 환경전(歡慶殿)을 바라봅니다. 함인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내전 건물들은 순조 30년(1830) 대화재 직후에 재건되었습니다. 경춘전과 환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표정이 없는 건물들입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듯 모든 부속 건물들이 사라지고 망연자실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제에 의한 창경궁 공원화 작업과 함께 부속 건물과 담장이 사라져 버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에도 격과 신분이 존재하였습니다. 우리가 궁궐에서 만나는 모든 건물에는 그 건물의 신분이 현판 속 이름에 드러나 있습니다.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가장 격이 높은 전(殿)은 왕, 왕비, 대비의 공적인 활동 공간입니다. 유일하게 하늘을 닮은 둥근기둥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당(堂)은 규모가 떨어지진 않지만 사적 공간으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사각기둥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합(閤)과 각(閣)은 전, 당의 부속 건물들의 신분입니다. 재(齋)는 주로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공간입니다. 주거, 독서, 사색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낯설다고요? 창덕궁의 낙선재(樂善齋)를 한번 떠올려볼까요? 낙선재는 1980년대까지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살았던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집으로, 왕실 여성들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이었습니다. 헌(軒)은 대청마루가 발달된 집으로, 사극에서 사또가 대청마루에 놓인 의자 위에 앉아 죄인을 심문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동헌을 떠올려 보면 되겠습니다. 루(樓)는 2층 형태의 누마루로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정(亭)은 아시다시피 정자를 일컫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을 전하(殿下)라고 부르는 것은 전(殿)에 계시는 분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 부르는 것입니다. 높은 관리를 일컫는 당하, 합하, 각하라는 말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전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을 각하로 불렀던 것은 잘못된 용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폐하(돌 기단 아래), 휘하(깃발 아래), 슬하(무릎 아래) 등도 모두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한자어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위계를 갖는 것이 궁중의 건물이었으니 지금은 저 덩그란 경춘전과 환경전도 원래는 수많은 부속 건물과 행랑, 담장으로 에워싸인 최고 권위의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경춘전의 한(恨) 많은 여인들
경춘전은 22대 정조와 24대 헌종 임금이 탄생한 곳일 뿐만 아니라, 한(恨) 많은 조선의 궁중 여인의 순위를 다투는 분들이 숨을 거둔 곳입니다. 스물한 살에 과부가 된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그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손자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 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하자 이를 꾸짖습니다. 화가 난 연산군이 할머니 인수대비의 가슴을 밀치면서 그 충격으로 얼마 후 승하합니다.
두 번째로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종기와 부종의 합병증으로 처절하게 투병하다 복위 7년 만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승하합니다.
마지막 주인공은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 씨입니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면서 한때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으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극진한 효도를 받았지요. 그러나 정조 사후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하여 수난을 당하는 어려움을 다시 겪게 됩니다.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 경춘전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홀로 덜렁 남은 경춘전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부귀와 허욕, 질투와 미움... 사람의 짧은 생애에 이런 것들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백 년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을 살 것처럼 움켜쥐는 것이 인간이란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제 내 모든 욕심과 미움도 그만 내려놓고 싶어 집니다.
아내는 많아도 여인 복은 없었던 중종
환경전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까요?
이곳은 11대 중종 임금이 승하한 집입니다. 중종은 조선의 왕들 중에서도 많은 여인을 거느린 왕이었습니다. 자그마치 10명의 부인을 두어 12명씩 거느린 태종과 성종에 이어 3위에 랭크된 임금입니다. 중전만 3명에 후궁이 7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부인을 두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지금의 정릉에 외로이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사정을 한번 들어볼까요?
이복형인 연산군의 폭정이 끝없이 이어지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이 바로 중종입니다. 그에게는 매우 사랑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후일의 폐비 신 씨이지요. 진성대군이 즉위하기 전 반정군은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을 찾아갑니다. 사위를 왕으로, 딸을 왕비로 삼는 반정 계획에 동참하라는 반정군의 제안을 신수근은 거절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연산군은 자신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여동생인 중전 신 씨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정은 성공했고 신수근은 반정군에 의해 제거 1순위 대상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딸마저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기에 이릅니다. 중종은 이 단경왕후 신 씨를 무척 사랑하였지만 반정군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은 결국 눈물의 이별을 맞이하게 되고, 중종은 단경왕후가 그리워 종종 경회루에 올라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인왕산 기슭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폐비 신 씨는 자신의 분홍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어 신호를 보냈지요. 지금도 도성 안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는 후일 12대 인종이 되는 왕자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승하합니다.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는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데요, 정치에 개입해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여장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종을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을 13대 왕(명종)으로 즉위시켰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장경왕후 곁에 묻혀있던 남편 중종의 무덤을 지금의 고양시 서삼릉에서 서울 삼성동의 정릉으로 굳이 이장했습니다. 자신이 죽어 그 옆으로 갈 계획이었지요. 그러나 그곳은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등 길지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되었고 그녀는 사후에 다른 곳으로 모셔졌습니다. 그곳이 바로 태릉(太陵)입니다. 태릉선수촌(노원구 공릉동)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결국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두고도 외로이 홀로 잠든 중종은, 마지막 순간만큼은 내의원의 의녀이자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한 장금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곳 환경전에서 말입니다.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16대 인조 임금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세상을 등진 곳도 이곳 환경전입니다.
병자호란(1636)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조선에 닥친 큰 불행이었습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태종이 12만 명의 군사를 내어 직접 조선을 침략합니다. 명을 치기 전 조선을 굴복시켜 물자를 확보하고 후방을 든든히 하고자 한 계략이었습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 인조는 47일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고통은 전쟁이 끝난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청은 어마어마한 세폐(歲幣)를 요구했고, 조선 백성 수십만 명이 포로가 되어 선양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피할 순 없었지요. 식솔들과 함께 끌려가 오랜 인질 생활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명을 멸하고 중원을 차지한 청은 안정을 찾자 9년 만에 소현세자와 그의 식솔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합니다. 오한이 나 치료받은 지 불과 4일 만의 일입니다. 실록에 공식 병명은 학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학질은 현대의 말라리아로 당시 온대지역에서도 유행한 질병이었습니다. 따라서 한방에도 학질에 대한 침구와 약 처방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는 어린이나 노약자 외에는 급사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지금껏 의견이 분분합니다. 놀랍게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아버지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게 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인조가 혐의를 받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세자의 시신을 본 종실의 진원군 이세완의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얼굴을 덮고 있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은연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의관 이형익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이를 규명하려 하지 않고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두릅니다. 의관 이형익은 인조가 총애한 애첩 조소용의 친정집에 출입하던 자로 3개월 전 특채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조소용이 소현세자의 부인이었던 세자빈 강 씨와 무척 사이가 나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게다가 장례는 세자의 지위에 맞지 않는 홀대의 수준으로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문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발생합니다. 세자빈 강 씨가 인조가 먹을 전복에 독을 넣었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자 부부의 세 어린 아들들도 모조리 제주로 귀향을 가고, 세자빈의 친정식구와 궁녀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돌봐 주는 사람도 없어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는 어려서 목숨을 잃습니다. 한마디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지요.
많은 사학자들의 의심대로 인조가 소현세자와 식솔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대체 왜 그랬을까 궁금해집니다. 소현세자는 선양관에서의 인질 생활 동안 단순히 인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대사(大使)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청의 무리한 물자 요구를 막기도 하고, 청이 조·청간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하기도 했기에 소현세자는 양국 간 조정자로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청과의 무역과 둔전 경영에서 상당한 재력을 비축하여 몰래 조선인 포로를 구출하기도 합니다. 소현세자가 청으로부터 인정받는 분위기를 전해 들은 인조는 매우 불쾌해하고 노여워합니다. 늙은 왕을 내치고 젊은 왕을 앉혀야 한다는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에 초조하기도 했을 터입니다. 특히 소현세자가 선양에서 만난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A.)을 통해 입수한 서양의 과학 문물과 천주교 등은 인조를 더욱 자극했습니다. 반청친명(反淸親明) 정책을 고수하던 인조에게는 청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친청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아들을 내내 못마땅해하던 인조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연구 결과입니다.
범부(凡夫)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러한 일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부모든 형제든 심지어 자식이라 해도 용납하지 않은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도 없이 존재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아담 샬이 조선의 왕자 소현세자에 대해 남긴 묘사처럼 ‘서양문물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그가 차기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