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전을 보고 나오면 동선이 혼란스럽습니다. 정무 건축 공간(外殿)의 건물들이 통상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과는 달리 명정전을 향해 등을 대고 있는 건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남향을 하고 있는 건물이 바로 문정전입니다. 홀로 방향을 틀어 앉은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역시 중국에서 온 규칙을 무조건 고수하기보다는 실용적으로 공간 활용을 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건물은 영조 비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으로 사용되면서 휘령전(徽寧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장소로 원래의 용도는 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가 1986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이곳은 조선 궁중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난 현장입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인 21대 영조 임금과 그의 외아들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도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정전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영조 어진 초상화(국립 고궁박물관 소장)와 사도세자 상상도
사도세자는 왕실과 부왕 영조의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고 태어난 왕자로 어린 시절 줄곧 영특함을 보였습니다. 사실 세자의 영특함은 부왕의 아들에 대한 엄청난 바지바람에 힘입은 것으로, 세자는 조선 역사상 가장 빠른 원자 책봉(태어나자마자)과 세자 책봉(2세 때)의 기록을 갖게 됩니다. 심지어 3세부터는 혹독한 조기교육이자 왕세자 교육인 서연이 시작됩니다. 세자는 3세 때 이미 ‘天地’, ‘父母’ 등 63자를 인식할 수 있었고, 온 세상이 임금의 은택을 입은 봄이라는 뜻의 ‘天地王春’을 쓰자 대신들이 다투어 가지려 해 영조가 얼마 뒤 12장을 가져와 두 자씩 쓰게 해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세자의 교육을 위해 부왕이 직접 교재를 쓰고, 세자시강원(춘방)의 관리를 통해 세자의 교육 성취 과정을 직접 세심히 챙기기까지 했으니 세자의 교육에 대한 영조의 관심과 기대는 역대 그 어느 왕보다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8세 때 글씨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러나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와 무예를 좋아하는 무인적 기질을 타고났던 세자는 10세 때, “글을 읽는 것이 좋은가, 싫은가?”라는 부왕의 질문에 “싫을 때가 더 많다.”라는 솔직한 대답을 내놓아 아버지를 실망시킵니다. 사전 훈련을 목적으로 15세 때부터 시작된 대리청정을 계기로 아버지와 세자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일 처리하는 능력과 스스로를 수련하는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되고, 이는 여러 번의 양위 파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0세를 전후해 세자는 아버지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에 시달립니다. 세자빈 혜경궁 홍 씨는 이를 의대증(衣帶症)이라 표현했는데 현대 의학에서는 이 같은 증상을 우울증, 강박증, 공포증, 공황장애 등으로 봅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된 세자는 궁비와 내시를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이는 기행을 저질렀으며, 20일간 궁을 빠져나가 평안도 지방으로 부왕 몰래 왕래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영조의 분노를 사 결국 '임오화변'이라는 극단적이고도 비극적 사건으로 치닫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그 배경에 세자의 정신건강상의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세자의 소론 지향적 정치 견해가 집권세력인 노론뿐 아니라 노론 편향인 부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이것이 세자에 대한 견제와 미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1762년(영조 38) 윤 5월 13일, 드디어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하고 창경궁의 휘령전(지금의 문정전) 앞뜰로 불러 자결을 명한 뒤 곧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합니다. 이때 세자의 나이 28세였습니다. 이처럼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창경궁은 사도세자가 태어난 순간부터 뒤주에 갇혀 죽는 순간까지의 모든 자취를 간직한 공간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도세자의 아들, 22대 정조 임금은 창경궁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습니다. 홀로 남향한 문정전의 앞뜰은 수백 년이 흘렀건만 이곳을 들를 때마다 그날의 영조의 쩌렁쩌렁한 호통과 사도세자의 살려달란 다급한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만 같아 서늘함을 줍니다.
비록 세자를 미워한 기사(紀事)에 비해 적은 분량이긴 하지만 실록에는 영조의 애틋한 부정이 드러난 기사도 다수 등장합니다. 사후에 思悼(사도, 생각하니 슬프다는 뜻)라는 시호를 내린 것도 미약한 끈으로나마 이어진 부자지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혹자는 이조차 영조의 의도된 정치쇼로 보기도 합니다. 권력은 비정하고 그 비정한 속성으로 인해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희생시키기에 이르지만, 권력과 부를 통째로 지닌 임금이라 한들 그 회한은 무엇보다 컸으리라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임오화변, 그 비극의 주인공은 사도세자만은 아닐 터입니다. 나 자신이 부모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 영조의 마음과 고통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일까요?
문정전을 돌아 나오면 영조의 어필인 ‘숭문당(崇文堂)’이란 현판을 단 누각 형태의 독특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글씨의 단아함은 영조의 지나치리만큼 깔끔한 성품을 닮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집이라는 의미는 학문을 사랑한 군주답습니다. 영조는 이곳에서 성균관의 태학생을 불러 시험을 보거나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경종 때 세운 건물은 순조 30년(1830)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해 중건하여 오늘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