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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Oct 21. 2024

41. 마녀 토벌

리온과의 만남을 끝내고 집무실 밖을 나오던 이다는 휘청였다.

그와 만났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결같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의 지위가, 그의 눈빛이, 그의 말투나 행동 등, 그가 가진 것들은 모두 이다를 죄어오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는 것 같군. 잘난 왕자님이었을 때나, 나라의 지존이 되었을 때나.’



앞으로 내게 남은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내게 남은 사명을 완수할 수는 있는 걸까.

그를 도운 뒤 하루라도 빨리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아야…



“괜찮습니까. 얼굴빛이 안 좋은데.”


“…왕비님.”



고개를 들어 칸나를 본 이다는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감정의 동요 없이 인사를 받는 칸나를 보며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당부를 남기던 모습이 생각났다. 


마녀이면서 마녀의 희생을 앞세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

마법 기사단은 왕실과 그들을 지키기 위한 세력을 키우는 것이지, 공격하기 위함은 아님을 기억해 달라던 그 말과 함께.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



그녀가 듣기에 뜻 모를 소리를 하고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저 헛소리라 치부하고 외면해 주기를 기대하고 돌아선 이다에게 칸나는 조용히 답했다.



“끝이 있다고 해서,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분명하고 단호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듣고 싶은 틈을 발견한 이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피할 수 없다면,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녀의 미소를 본 칸나의 마음속은 불쾌감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뭘 당연한 듯이 말하는 거야.

사람을 통에 담긴 화살처럼 이용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 마.


당신이 선택한 거잖아.



“그러나 그 말을 무기 삼아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뭘 하고 있는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누구와 말씀입니까..?”


“당신과 내가 말입니다.”



이제 칸나는 타인에게, 자신의 적이 되고 싶지 않거든 행동거지에 유의하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다는 그런 그녀의 성장이 기쁘면서도,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왕비님의 적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제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걸 위해서 전하의 곁에서 일할 뿐이에요.”



목숨보다 중요한 것..?

설마…



“…사람인가요?”


“…사람들이지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

그녀와 같은 마녀들일까.

아니..

그렇다기엔 일의 진행 방식이…



살짝 수상쩍은 느낌은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녀에게도 있었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



“부디 당신이 하는 일이, 사람의 목숨을 성냥개비처럼 쓰는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칸나의 뒷모습을 보던 이다는 한동안 그곳에 서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가쁜 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망토를 벗고 의자에 앉아 호흡을 고르게 했다.



“시간이 빠르구나..”



오늘따라 유난히 이다의 머릿속을 온통 떠나지 않는 리온과 칸나가 자꾸 자신을 과거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


-19년 전. 제르만의 왕실.



“전하! 큰일입니다. 이제는 제르만 전체에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



끔찍한 소식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갑작스레 시작된 역병은, 제르만의 수도인 타헨을 비롯해 지방에까지 퍼졌다.


처음 수도에서 역병이 발병했을 당시, 왕실에서 조사단을 보내어 확인하고 철저하게 격리하도록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마치 둑의 여러 구멍으로 물이 새듯,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탓에 원인과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며 빠른 발병과 높은 치사율로 수많은 국민이 죽어나갔다.



“대체 이게 무슨…”



괴로워하는 국왕 마크윈*의 뒤로 책임을 묻는 소리가 높아졌다. (*리온의 아버지, 제르만의 선대 왕)

국민들의 불안과 분노도 갈수록 거세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가족들을 잃는 그들은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는 듯 왕실을 향해 원망을 쏟아부었다.



“대책을 얼른 마련하셔야 합니다.”


“대책은 무슨 대책? 저 병의 원인도 모르는데 치료를 어찌하려고?”


“치료만 대책입니까? 저 성난 국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요?!”


“그럼 저대로 놔둬서, 분노로 온 도시가 뒤덮이는 걸 방관하자는 겁니까? 지금 저들은 왕실에 불이라도 지를 판인데.”



문제 해결을 위해 모인 귀족들은 번번이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전례 없던 일이라 마땅히 참고로 삼을 것도 없던 탓에 골머리를 썩던 그들 앞에 나온 것은, 예상치 못한 계책이었다.



“…차라리 전가할 존재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



“어차피 이 일은 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최대한 덜 퍼질 수 있도록 막기야 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지요. 그렇다면, 누군가 대신 원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는데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루드비히 백작의 말을 듣던 마크윈은 생각에 잠겼다.



“마땅한 상대는 있습니까?”


“보통은 외부로 돌리지만, 제르만 내부에 역병이 퍼져 국민들이 죽어나갔으니.. 전쟁을 일으켰다간 되레 크게 패하고 말 겁니다. 내부에서 찾아야지요.”


“사람들 중에 누가 그 원망을 자처한답니까. 말 못 하는 짐승이나 그런 꼴을 당하지.”


“그럼, 산양은 어떻습니까. 오래전부터 악마의 모습이라며 숭배하는 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역병을 가라앉히기 위해 수많은 산양을 재물로 바친단 말이에요?”


“숫자가 문젭니까?”


“상황이 이래서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든데, 수십이 될지 수백이 될지 모를 산양들을…!!”



진정되는 듯싶던 회의는 다시금 높은 언성이 오고 갔다.

결국 날이 저물어 그대로 파하게 되었을 뿐,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골머리를 앓는 마크윈을 가만히 보던 저스틴*은 조용히 회의장에 남았다. (*저스틴 폰 루이스 자작)



“할 말이라도 남은 건가?”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던 마크윈에게, 저스틴은 미소를 지으며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악책을 내놓았다.



“..마녀들은 어떻습니까.”


“?”


“원한을 받을 이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제물로 쓰자는 말인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루이스 자작.. 그게 무슨…”


“그들은 악마와 소통하는 이들입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까? 선왕 때의 일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의 말에 마크윈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들은 (이제는 처형된) 타크 후작의 내란에 속한 일등 공신들이었다.

그 뒤로 제르만에서 마녀에 대한 인식은 급격히 나빠졌으며, 마녀란 음지에 속한 자들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원한의 대상으로 삼아, 산 제물로서 분노한 국민들 앞에 던져주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 마크윈의 귓가에, 저스틴은 그가 혹할만한 이야기들을 흘려 넣었다.



“사실 역병이 갑작스레 시작된 것도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악마 중에는 역병을 일으키는 존재도 있다고 합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들이 진짜 범인일지.”

“내란 때의 일로 원한을 품고, 나라를 역병에 빠뜨려 멸망시키고 그들이 차지하려는 것일지도요.”



밤늦도록 저스틴과 마크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둘은 회의장을 나오게 되었고,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저스틴은 성 내에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다시 열린 회의에서 마크윈의 얼굴은 한층 밝아졌다.

하룻밤 새에 달라진 그의 모습에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 사이로, 내부 사정을 모르는 프로이센 귀족이 뒤늦게 회의에 참여했다.



“일단 타헨 내에 있는 모든 의사들과 치료사들을 각 거리에 공평하게 배치하고, 타 지역에도 역병이 발생한 곳은 의사들이 가볼 수 있도록 물자 지원을 조치해 두었습니다.”


“수고했소. 언제나 고생이 많군.”


“아직 역병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건..”


“아, 괜찮습니다. 원인을 알았으니.”



저스틴은 마크윈에게 상황을 보고하던 테스*의 말을 가로챘다. (테스 폰 프로이센 공작, 스카드의 아버지)



“?”



그는 밝은 얼굴과 대조되는 엄청난 계획을 늘어놓았다.

저스틴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던 테스는 마크윈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전하! 정말 이 방법이 옳다 보십니까?”


“그들이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나?”


“그게 이 역병의 명확한 원인이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더욱이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녀는 드물다 들었습니다.”



테스의 기에 눌린 것인지, 그의 시선을 피하는 마크윈을 보던 저스틴이 비꼬듯 말을 던졌다.



“아니면, 달리 다른 방법이 있으십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현장에서 그 참혹함을 보시고도 그들을 두둔할 마음이 있으시다니..”



이 새끼가 진짜…

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구석이랑 왕궁에만 처박혀 있어 놓고. 뭐?


일에 지쳐 피로함을 내보이던 테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루이스 자작. 당신이 직접 역병이 발생한 곳에 가서 마녀들과의 연관성을 찾아오게. 두 말 없이 의견을 받을 테니.”


“아니.. 왜 제가.. 전하!!!”



저스틴은 당황하며 마크윈을 보았지만, 그가 별 다른 방어막이 되어주진 못했다.

눈치를 보던 마크윈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으음... 하지만, 이 일을 계속 미룰 수도 없는 건 사실이야. 역병은 널리 퍼지고 있고, 의사도 부족하니.”


“사람이 부족하다면, 의사를 통해 교육시켜 보조나 조수를 늘리면 됩니다. 현장에 투여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하, 말씀해 보세요. 역병에 필요한 게 치료입니까, 인신공양입니까?!”



테스의 말에는 옳음이 있었다. 

그러나 마크윈과 다른 귀족들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역병에 대한 두려움과 하늘을 찌를 듯한 국민들의 분노를 생각하며 루이스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해결책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


“해결책? 마녀를 잡아다 처형하면 역병이 사라진다는 겁니까?”


“해보지도 않고 왜 그러십니까.”


“그래요. 해보지도 않고. 일단, 해보고 나서..”



-쾅!!!



테스가 회의장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보고 나서?!?! 아니면, 그땐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사람의 목숨은 하나뿐인데 아니라고 뒤늦게 밝혀지면, 처형당한 마녀들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합니까?! 되돌릴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는 선택을 이런 중대사 앞에 의논하다니.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말이 없는 귀족들 사이로 저스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집불통 같으니.

이렇게 좋은 수를 생각해 낼 수도 없으면서.

당신에게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공작님께서 찾아오십시오. 그들과 역병이 관련 없다는 증거를.”


“?”


“저를 비롯한 귀족들과 전하까지도, 마녀들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작 각하께서 직접 증거를 찾아오시면, 마녀들에 대한 토벌 계획은 중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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