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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Oct 14. 2024

안돼. 하지 마. 멈춰!

<재수는 내가 없는 것 같은데>



다음 날, 다시 회의가 열렸다.


전날에 불거졌던 결혼 문제는 누구 할 것 없이 암묵적으로 침묵하고 넘어갔다.

먼저 범인과 물건을 찾고, 바이올렛에 관한 일도 범인을 찾으면 그 뒤에 의논하기로 결정했다.



"영주를 새로 결정해야 하는 일도 있으니 뮐러 후작이 국경과 해역을 살펴보고, 사건을 조사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토마스 백작이 동행해서 같이 보고서를 올리면 되겠군."



리온은 누구나 예상 가능한 수순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다른 귀족들도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넘어갔고, 스카드는 회의가 끝날 무렵 조용히 헤르나에게 쪽지를 전했다.



"하아.... 젠장..."



토마스 백작과 문제를 해결하러 떠나는 헤르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누가 봐도 책임을 대신 질 사람을 찾는 건데, 그게 하필 자신이라니.


문제가 생길 거라면 육지에 올라와서 사라지지, 왜 바다 한가운데서 없어진 거야?!


선대부터 오랫동안 해적을 상대해 온 뮐러 가문의 그녀는 그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다른 이들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이번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찜찜할 때는 꼭 후폭풍이 나타나던데...'



토마스는 리온이 그에게 일을 명령한 시점부터 헤르나 곁에 착 붙어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다가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 그럼 우리는 사건을 조사해야겠네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일단은 우리 집이요. 오늘 필요한 걸 준비해서 내일 날이 밝는대로 출발할 거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요."


"네에??! 하지만 난 사절이라 개인 저택에 머물기는..."


"사절이고 뭐고 간에. 내가 바쁜 아침에 성까지 모시러 와야겠어요?"



토마스는 헤르나의 기세가 이사벨을 떠올리게 한다는 생각을 하며, 짐을 챙겨 와 조용히 뮐러 후작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자 눈치 없는 그가 다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떠드는 통에 헤르나의 머리는 지끈거렸다.


아...

회의 때부터 말 어지간히 많네.


스카드가 저 입 마음에 안 든다고 했을 때, 꿰매달라고 할걸.

이 정도면 논문이라도 써서 외워온 거 아닌가?

아니면 바이올렛이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거야!?



"사귀었습니까?"



헤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토마스가 말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바이올렛 양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과히 대단하여, 이토록 피곤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 헤르나가 그의 입을 막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아니면 입 좀 닥쳐요. 나는 지금 잘해봐야 본전도 못 건지게 생겼으니까."



이제 좀 조용히 집에 갈 수 있게 되어 한시름 덜은 헤르나가 호흡을 고른 뒤, 그에게 물었다.



"배는 좀 타봤어요?"


"여기 올 때 탔어요."


"......."



유년 시절부터 제르만의 해군을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서 배를 타는 일이 많았던 그녀에게, 토마스의 대답은 '나 물에 가라앉아요.' 라는 소리였다.

한심한 소리하네, 라는 표정을 여지없이 드러낸 헤르나의 얼굴을 본 그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토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헤르나는 수영도 배우지 못한 연약한 귀족인 그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비록 말은 많지만, 그가 언제 어디서든 자신에게 대항하기는 어려울 거란 느낌이 들었다.



"배에서 밀어버리면 흔적도 안 남겠군."



헤르나가 씩 웃으며 살벌한 반농담을 건네자, 토마스가 가방을 끌어안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게 무슨..!?!?!?!"




<재수는 내가 없는 것 같은데 2.>



방으로 돌아온 리온의 한숨이 깊었다.


헤르나를 보냈지만 일의 진행과 결과도 신경 쓰이고, 스카드와 이사벨도 신경 쓰이고.

지금은 이런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닌데 말이지...



"브리텐드 하고도 껄끄럽게 됐군."


"바이올렛 왕녀님을 찾아드리면 낫지 않을까요?"



이안의 말에 리온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몸값을 받으려면 벌써 이사벨이나 나한테 어떤 움직임을 보였을 거야. 아무것도 없다는 건.....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



해적들을 만났다면 분명 바이올렛과 기사들이 신분을 밝혔을 터...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돈을 요구하는 쪽이 큰 이득이 될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건, 왕실을 상대로 흥정해서 꼬리를 밟히는 것보다 목격자를 없앤 뒤 두고두고 판매할 수 있는 물건이나 얻는 게 낫다는 얘기였다.


배 안을 가득 채웠던 포피와 케비스를 자기들끼리 나누고 처분한다...

이득이 큰 물건이니 처음엔 꼬리를 드러내지 않아도 분명 누군가는 참을성 없이 머리를 드러낼 거다.

그럼 그때 잡으면 돼.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인데...



"이사벨에게 바이올렛을 받아 스카드의 감시로 활용하려 했더니..."



리온은 눈을 감고 바이올렛의 상황을 떠올려봤다.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거절당한 마음.

대신 충분히 좋아할 만한 상대를 제시해 줬다.

 

공작에, 부자에, 미남에, 권력자.

한 번의 사별쯤은 아무런 흠이 되지 않는 남자.


정략혼을 거절하던 그녀도 스카드의 초상화를 받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마음을 바꿨다.

이사벨 역시 나무랄 데 없는 혼처에다 친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바이올렛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뻐했다.


한 나라의 왕녀였기에 호위가 부족하지는 않았을 텐데.


...


해적이 그만큼 강했을까, 아니면 연합이 있었을까. 

누구를 만났든, 그녀의 결말이 정해져 있었던 거라면... 



"...재수가 없었네."


"여왕님께서 일을 꾸미고 모른 척했을 확률은요?"


"이사벨은 똑똑한 여자야. 눈앞에서 멀리 치워버릴 수 있는 방법이 생긴 상대를 굳이 위험 부담이 큰 살인교사로 바꾸진 않았을 걸."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사벨과 그의 최측근, 그리고 나뿐이다.

스카드나 헤르나는 몰랐으니, 결혼에 대한 일을 알고 일을 처리한 것은 아닐 테고.



"이제 우리에게 최선은 헤르나가 해적을 찾아내서 처벌한 다음, 표면적으로나마 이사벨과 브리텐드를 위로하는 거야. 처분하지 못한 포피랑 케비스를 찾아서 남은 금액의 절반을 지불한다면, 나머지는 그쪽 내부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지원은 받을 수 없게 되었군요."



이안의 말에 백설공주와 칸나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던 리온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나중에라도 가능해. 가장 좋은 방법은, 당위성을 해제하는 거니까. 괜찮아."



책상 위에 있는 바이올렛의 초상화를 찢어버리며 리온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긴 살아서 결혼을 했어도 결국 재수는 없었겠구나..."




<안돼. 하지 마.>



칸나가 동쪽 성으로 가서 백설공주가 함께 놀고 있을 때, 스카드가 방문했다.

그는 공작이 온 것을 알리겠다는 여관을 만류하고 슬쩍 문을 열어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마실게요. 고마워요, 멍멍이씨."



인형과 함께 하는 소꿉놀이. 

까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백설공주를 보는 스카드의 마음이 흐뭇했다.


엘레나..

우리의 공주님은 잘 자라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때 백설공주가 곰인형을 가지고 나타났고, 칸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형을 쳐다보았다.



"...누구신가요?"


"트카두."


"아하.. 공작님이시구나...."



급격히 어두워진 낯빛으로 곰인형을 쳐다보던 칸나는 망설이는 듯하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곰탱 공작님."


"안냥."


"어떻게.. 뜨거워서 입천장이 홀랑 까질 것 같은 차인데.. 좀 드시겠어요?"



스카드는 갑작스레 달라진 칸나의 분위기에 의아했는데, 그 순간 백설공주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뽀뽀해."


"..응? 뭐라고?"


"뽑뽀."



칸나는 아니라며 손사래 치고 거절했지만, 백설공주는 들고 있던 곰인형을 칸나의 토끼인형과 입맞춤시켰다.



"악-!?"


-흠칫!



작은 비명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칸나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백설공주가 놀랄까 봐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몹시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당황한 것은 밖에서 보고 있던 스카드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서서 나중에 올까를 고민하던 찰나, 열린 틈 사이로 스카드를 발견한 백설공주가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스카드는 얼른 백설공주를 안아 들었고, 헝클어진 머리와 옷차림의 칸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렇게 드레스를 구겨가며 머리가 흐트러지도록 무얼 하고 논 것인지. 

그녀의 모습은 귀족들 저택에 있는 다른 보모들과 별 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백설공주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해하며 진심으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본 스카드는 그간 여관들이 칭찬했던 칸나의 모습을 눈앞에서 본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같이.. 같이.."



스카드의 손을 끌며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백설공주의 바람을 들어주느라, 어색한 둘이 합류한 세 사람의 인형놀이가 시작되었다.


곰인형을 배정받은 스카드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놀이에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무언가 못마땅한 듯 백설공주가 그를 나무랐다.



"또빠두."


"?"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는 스카드에게 칸나가 피식 웃으며 전했다.



"똑바로 하라고 하네요."


"아, 네.. 어.. 그러니까..."



스카드는 지금 이 인형놀이보다 전쟁에 나가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백설공주의 요구에 맞춰 최선을 다해 곰돌이의 팔다리를 움직이며 대사를 읊었다.



'아하하하.. 애쓰고 있네. 내 앞에서 하려니 더 민망하지? 그래, 공주. 이참에 삼촌을 골려주자!'



당황해하는 스카드를 보는 것이 칸나는 어쩐지 고소했는데, 백설공주가 두 사람이 들고 있던 인형들에게 외치는 소리에 자신도 역시 당황스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뽑뽀해!"


"?!" 



칸나와 스카드는 기겁하며 함께 거절했지만, 백설공주는 뽀뽀를 외치며 두 사람의 인형을 자신이 가져다가 다시 입맞춤시켰다.


멈추라는 칸나와 스카드의 외침에 문 밖에 있던 여관들이 깜짝 놀라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시냐며 걱정하는 그들에게, 둘은 미리 입이라도 맞춰놓은 것처럼 아무 일 없듯이 넘어가려 했다.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왕비님."


"....그럼요. 인형이 그저.... 조금.. 아무튼 나가보세요."



한참 뒤, 잠이 든 백설공주에게 인사를 건네며 칸나와 스카드가 방을 나왔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지만, 대화가 더 어색한 둘이었기에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동쪽 성을 나설 때까지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스카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공주님 덕분에 왕비님과 뽀뽀했네요."


"네에?!"



정색하며 싫어하는 칸나를 본 스카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칸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여관들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인했다.



"누가 들을까 겁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걱정 마십시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없었던 일도 있었다고 하는 곳이잖아요, 여기는."


"......."



그 말에 스카드는 딱히 반박하지 않으며 덧붙였다.



"있었던 일도 없었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시선을 떨군 그의 눈에 잠시 슬픔이 비친 것 같은 건 착각일까.


계속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는데, 멀리서 리온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리온은 나란히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자 걸음이 빨라졌는데, 그의 속내를 아는 스카드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리온이 보란 듯이 칸나에게 백설공주의 귀여웠던 일화를 이야기했고, 둘은 같이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만, 귀에는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화목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리온은 별안간 뛰기 시작했다.



"?!"



당황한 칸나와 다르게 스카드는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자 즐거웠다.



아... 이대로 손잡고 도망가 버리고 싶네.


어떨까.

네가 소중히 생각하는 걸 빼앗긴다면.


나처럼 너도 절망의 끝에 가라앉을까.

아니면, 또 다른 소중한 걸 찾을까.



리온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썼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얼굴이 한껏 구겨진 채 그를 불렀다.



"......스카드 공작."



스카드는 그가 여기까지 뛰어온 걸 칭찬하고 싶었다.

리온이 아끼는 것을 눈으로 제대로 확인한 것 같아 기쁨이 컸다.



"뛰느라 숨이 가쁜 것 같은데, 걸으시지 그랬습니까."



그의 말대로 리온은 숨을 몰아 쉬느라 제대로 말을 하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숨을 고른 뒤 어떻게든 한마디 하고 싶어 하는 리온을 두고, 스카드는 먼저 인사를 건네고 가버렸다.


스카드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리온은, 좀 전에 두 사람 사이에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궁금했지만 칸나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왕으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남자로서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온통 얼룩과 어둠으로 흐트러진 자신의 속을 감추며 칸나를 끌어안았다.



집에 돌아온 스카드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리온은 커다란 상처가 될지도 모를 변수를 하나 마련해 왔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상대로.

마녀를 고른 것은 그에게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차라리 귀족을 골랐으면, 고분고분 말이라도 잘 들었을 텐데."



잃을 것이 많은 여타의 귀족들과 달리, 칸나는 처음부터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리온이 그녀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한들, 타격이 있을까.

물욕에 지배되는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은 귀중품을 선물로 보냈던 스카드는 그녀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리온..

심연에 가라앉은 내 슬픔과 분노를 너에게 돌려줄 무기를 찾은 것 같네.


고마워.



스카드는 칸나에게 소중한 것을 바꾸고 싶었다.


리온에서 백설공주로.

연정에서 모성으로.


백설공주를 견제하기 위해 리온이 직접 고른 상대가 백설공주를 지키게 하고 싶었다.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리온은 질투가 강한 성정이었다.

그건 엘레나를 포함한 여러 일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나쁘지 않은 계모를 연기하라고 부른 칸나에게,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리온은 분노하겠지.

그에게 백설공주는 양보의 대상이 아닐 테니까...


스스로 사랑을 주지는 못했으면서, 다른 이에게서 받는 것은 용납할 수는 없었던 치졸한 그의 모습들이 떠오른 스카드가 눈을 감았다.



"의무도 저버린 주제에. 이제와 사랑놀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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