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만에 도착한 브리텐드의 외교 사절 토마스 카퍼 백작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브리텐드와 우호와 대립을 오가는 관계에 있었던 제르만.
자국 내에서 생산하는 희귀 식물을 가공시켜 만든 제품 수출로 이익을 올리고 있던 브리텐드는 그간 폭리를 취하는 문제로 여러 국가와 항상 부딪힘이 있었다.
포피*와 케비스*의 원재료가 되었던 희귀 식물은 그 재배법이 까다로워 다른 나라에서는 취급하지 못하고 있어 별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작년부터는 에세에르그에서 재배가 가능해졌다.
*포피, 케비스 - 치료용으로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
이에 희귀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브리텐드가 에세에르그에서 상품화시키기 이전에 남아있는 재고를 모두 처분하려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격이 떨어진 틈을 타서 사두려던 제르만과 브리텐드가 손을 잡았다.
평소와 다른 낮은 호가에 쾌재를 부른 제르만이 잔뜩 사들였지만, 배는 제르만 해역을 넘어오다 해적을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함몰되었다.
이미 절반의 대금을 지불한 제르만도 손해, 이전보다 낮은 값에 넘겼는데 그마저도 남은 절반을 받을 수 없게 된 브리텐드도 손해.
해역 어디로 사라졌을지 알 수 없을 상품들...
남은 대금과 물건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두 나라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이 와중에 해적이 한 일이라 떠넘기고 물건을 취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브리텐드 때문에 제르만에서 강하게 반발.
사건을 조사하고 합의를 제출하러 브리텐드에서 사람이 온 것이었다.
제르만 왕실에서는 그를 예우하며 성심성의껏 대접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얼굴에 불만을 한가득 품은 토마스는, 나라의 문제를 의논하러 온 외교 사절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는 망나니 같았다.
계속 방 안에서도 불안한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하며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하는 바람에 시중을 드는 여관들은 모두 불안에 떨었다.
"빌어먹을...!"
복도 밖으로 새어 나오는 욕소리에 칸나가 멈춰 섰다.
리온을 만나러 가는 길.
브리텐드에서 손님이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격노한 상태라고는 못 들었는데.
격추됐던 배 안에 가족이라도 있는 걸까? 싶었는데 이내 쾅하고 문이 열리면서 흥분한 그가 튀어나왔다.
칸나를 보고 당황한 것도 잠시, 토마스는 그녀의 머리색을 한참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그를 본 칸나가 당황해서 머뭇거리는데, 뒤에서 스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무례한 사절은 처음입니다."
"왕비님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다니."
토마스는 그녀가 왕비라는 말에 얼른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눈동자는 계속 칸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제르만의 국왕이 신분이 없는 자와 재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 머리색은 대체...'
대충 차린 예의에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나쁜 것은 칸나가 아니라 제르만의 공작, 스카드였다.
아무리 칸나가 신분이 없는 사람이었다곤 하지만, 엄연히 제르만의 왕비인데. 저 태도는...
"눈알을 파버릴까요?"
"?!"
끔찍한 소리에 무슨 얘긴가 싶어 칸나가 돌아보니 어느새 옆에 선 스카드가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진짜 그럴 수도 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칸나가 눈치를 보며 속삭이자, 스카드가 씨익 웃었다.
그 표정을 보니 칸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인간이 정말....'
칸나는 어이없어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한 토마스의 태도에 기분 나쁜 스카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예 눈을 감게 해 줘야 되나.."
계속해서 칸나 왕비의 얼굴 근처에 토마스의 시선이 머무는 것을 확인한 스카드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압박했다.
"왕비님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굉장한 실례입니다. 설마 카퍼 백작께서 그런 예절도 모른다고는 안 하실 테고."
"저희가 이사벨 여왕님을 그렇게 쳐다봐도 괜찮을까요?"
자기 나라의 국왕이 언급되자, 토마스는 비로소 칸나에게서 눈을 피했다.
칸나는 스카드의 정중함을 포장한 냉정한 말투와 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제나가 죽던 날이 생각났다.
피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몸이 긴장됐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태연한 척 서 있지만,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숨을 고르고 침을 꼴깍 삼킨 뒤, 슬쩍 고개를 들어 스카드를 쳐다보았다.
긴장한 칸나의 얼굴을 본 스카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에게 부드러운 얼굴로 조용히 권했다.
"지금은 방으로 돌아가 계시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저 눈을 어떻게 할까>
회의가 열렸다.
시작 전부터 흥분 상태였던 토마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고의든 아니든 전부 제르만의 책임이라고 큰소리쳤다.
소리치는 것에 진절머리를 내는 리온과 스카드가 동시에 싸늘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브리텐드에는 귀가 잘 안 들리는 분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외교 사절로서 조용히 얘기하는 예절은 배우지 못했나?"
스카드는 미소로, 리온은 인상을 쓰며 한 마디씩 던졌다.
토마스는 그제야 숨을 고르며 진정했고, 브리텐드의 입장을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상품인 포피와 케비스가 사라졌으나, 그보다 무역선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브리텐드에서는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손해만 있는 것이 아님을 그는 강조했다.
"...배에 탄 상인들 중에 집안사람이라도 있었나.."
헤르나는 사람, 사람 해가며 흥분하는 그가 이해되질 않았다.
어느 해역이나 해적을 만나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는 일이 다반수였기 때문에.
그녀도 당연히 그런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해적을 만났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침착하게 얘기를 듣는 제르만의 귀족들과 달리, 말하던 와중 토마스는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배 안에 왕족이라도 탔었나. 왜 저러는 거야.."
왜 저렇게 난리일까 싶어 혼자 속삭이듯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사실 지금 제일 골치 아픈 것은 헤르나 본인이었다.
제르만에서는 그간 해적이 나타나 소란을 일으킬 때마다, 국경 해안지역의 영지를 소유하며 경비를 맡고 있던 뮐러 후작가에서 소탕을 해왔다.
하지만 리온 즉위 이후 수도로 자리를 옮겨온 그녀가 국경 너머 해역까지 매일같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르나가 가주가 된 이후에는 방계의 가족들에게 성과 토지를 내어주며 관리할 것을 명령했는데, 지주였던 필립이 죽으면서 그의 뒤를 이을 적임자를 찾던 와중 하필 이런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해상 경비는 뮐러 가의 사병들, 그리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제르만의 일반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통솔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헤르나는 당연히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머리를 붙잡고 두통이 온다며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스카드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눈. 너는 어디 할래."
"...뭐?"
"파버리려고."
"미쳤냐?!"
깜짝 놀란 헤르나가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한 표정과 입모양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외교 사절을 앞에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오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냐고 조용히 묻자, 그는 토마스를 바라보다 전혀 상관없는 답을 했다.
"저 입도 싫긴 하군."
'이 새끼가 오늘따라 왜 또 이러는 거야...'
조용히.. 그러나 은은하게 돌아버린 것 같은 스카드의 눈을 보며 헤르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심각한 얼굴로 있는 그녀를 본 리온이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뮐러 후작."
"예? 아..."
그동안 어디까지 얘기가 진행이 된 것인지 몰라 당황하는 헤르나 대신에 스카드가 의견을 제시했다.
"저희 쪽에서도 사람을 꾸려 사건을 조사시키겠습니다."
"총괄은 토마스 카퍼 백작님께서 맡아주시죠. 저희 해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저희의 책임이긴 하지만, 사건을 일으킨 해적과 물건을 찾아낸다면 선내에서 일어난 인명 사고에 대해서는 더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인명 사고에 책임을 묻지 말라는 말에 토마스가 발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스카드는 태연하게 브리텐드에게 책임을 넘겼다.
"애초에 그런 고급 물건을 싣고 오면서 제대로 된 수비대도 꾸리지 않은 것은 브리텐드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토마스가 브리텐드에서는 분명 수비대를 꾸려 병사들과 함께 물건을 실었다며 반박했으나, 스카드는 그렇다면 이건 브리텐드의 병사들도 막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었냐며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행이었다고 못을 박았다.
"일방적으로 제르만에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불가합니다."
부들부들 떨던 토마스가 분을 삼키고 힘겹게 입을 뗐다.
"그 안에는 바이올렛 양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토마스의 이야기를 들은 리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바이올렛>
바이올렛 헤이즐리 랜스타커는 이사벨 여왕의 조카이자 그녀의 배다른 오빠의 딸이었다.
적자였지만 어린 딸이었던 이사벨과, 서자였지만 장남에 아들이었던 아론 사이에서 후계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을 당시, 그녀의 오빠가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 이사벨이 여왕직을 물려받았다.
이사벨은 왕위에 오른 이후 자신의 오빠를 살해했다는 의혹에 계속 휩싸였는데, 그를 의식한 것인지 바이올렛을 성에 들여 왕녀로 대우해 주었다.
이런 와중에 예상치 못한 바이올렛의 죽음...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들은 브리텐드 귀족들의 반 이상이 분노했다.
이사벨 여왕이 오빠였던 아론을 비롯해 그의 딸마저 죽게 만들었다며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이사벨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듣고 보니 브리텐드 왕실에 위기가 왔다고는 하지만, 바이올렛 양을 가장 위험에 빠뜨릴만한 사람은 해적도 제르만도 아닌 이사벨 여왕님이신 것 같은데."
상황을 보면 절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
숨기지 않고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은 스카드를 보며, 제르만의 귀족들은 긴장한 얼굴로 토마스를 보았다.
그리고 스카드의 배려 없는 냉정한 말에 토마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해서는 안될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저희 여왕님은 아론 왕자도 바이올렛 왕녀도 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굳이 이 나라의 공작과 결혼을 시킨다며 이렇게 의심받을 상황을 만들었겠습니까?!!?!!"
바이올렛은 리온의 재혼 상대 후보 중 하나였는데, (후보에 있었던) 다른 왕녀들과 달리 그녀는 이전부터 리온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리온을 좋아했다.
하지만 리온은 보통의 왕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결혼을 선택했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바이올렛은 한동안 그 일로 앓아누웠었다.
이사벨은 리온에게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이건 너무하지 않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차라리 자신들이 제안할 수 있는 것보다 좋은 조건을 선택했더라면 포기하기가 쉬웠을 텐데.
신분도 없는 여인과의 결혼.
이건 정말 사랑이라는 이름에 진 모양새였으니.
대신 리온은 바이올렛 왕녀를 프로이센 공작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후에 제르만 왕실에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귀족이 아닌 왕실을 후원해 줄 것을 비밀리에 보장받으며.
또한 이번에 침몰된 배에는 결혼에 관한 서찰을 가지고 왕녀가 함께 탔기 때문에, 그동안 거래를 해왔던 일반 무역선도 아니었으며, 그녀를 호위하기 위한 병사들도 당연히 함께 타 있었다.
배는 누가 봐도 브리텐드의 사절 혹은 그 이상이 타고 있다고 생각할 함선이었고, 침몰될 것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양국이 마찬가지였다.
국가적인 큰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
물론 제르만 내에서 그 배가 어떤 배인지, 누가 탔는지에 관한 것은 리온을 제외하고 알지 못했었다.
"...결혼?"
아차..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이미 시작부터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듣지도 못하고 예상치도 못한 공작의 재혼 이야기에 그곳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놀랐다.
스카드는 자신도 모르는 이사벨과의 결탁에 리온과 토마스를 번갈아 싸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할까.
아니.. 설명을 해야 할까..
리온도 토마스도 스카드를 보며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보십니까? 지금 제 눈을 쳐다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자국 내에서 위기에 몰린 이사벨 여왕.
그런 이사벨 여왕의 지지자이자 숨겨진 연인이라는 소문의 토마스 백작.
진실은 아직 알 수 없는 바이올렛 왕녀의 죽음.
이사벨 여왕과 후계에 관한 결탁은 아직 모르지만, 자신의 결혼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스카드.
그리고 연이은 충격에 휩싸인 귀족들.
회의는 또다시 엉망이 되었다.
<에필로그>
집에 돌아가는 길.
마차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스카드를 보며 헤르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표정에 같이 가겠다고 우기고 따라 탄 마차였는데...
그냥 집으로 갈 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드는 때에 스카드가 입을 열었다.
"술이나 한 잔 하자."
헤르나는 스카드의 집에 도착해 그의 집무실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방 안을 둘러보던 중, 벽 한쪽에 걸린 칸나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다트를 던지려고 걸어둔 건 아닐테고... 뭘까. 싶은 궁금함에 헤르나가 물어보았다.
"무슨 의미야, 저건?"
"....확인할게 좀 있어서."
"확인하고 나면?"
"글쎄... 내 편으로 만들거나, 적이 되거나."
그건 확인과는 별개로 당연한 얘기 아닌가.. 대체 뭘 확인하고자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헤르나는 리온의 후처를 끌어들이는 건 관두라고 얘기하려다 말을 삼켰다.
그보다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리온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기 전에 직접 선택한 누군가와 빨리 재혼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권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스카드는 웃으며 일침을 놓았다.
"한 번도 결혼 안 한 너한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난 앞으로도 안 할 거야."
자신만만하게 독신을 선언한 헤르나에게 스카드가 물었다.
"후계는?"
"헤르온이 있잖아. 동생이 낳을 아이를 입양할 거거든."
스카드는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필로그 2.>
만취한 두 사람을 본 론이 얼른 테이블을 정리하고 각자 방으로 옮겼다.
헤르나는 손님방으로.
스카드는 그의 침실로.
침대에 누운 스카드는 사라지는 의식 속에서 칸나 왕비의 모습을 보았다.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
우린 그렇게 친하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손을 내미는 걸까.
뭐.. 백설공주는 잘 부탁합니다.
'...분홍색 좋아.'
스카드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