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하 Oct 14. 2024

어찌됐든 평화

한참 뒤, 진정이 된 칸나가 사람을 시켜 회의장에서 리온이 공작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물었다.



그래..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정리하라는 말을 리온이 했다고는 하지만, 그게 다 죽여버리라는 얘기는 아니었을 텐데.

똑똑한 공작이 말을 그 따위로 알아듣는다고?



그 후 칸나가 첩자를 찾아내기 전에 스카드에 의한 빠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개중에는 왕실에서 쫓겨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여기에는 사라와 리사도 포함되었다)



'퇴직금은 줬으려나..'



칸나가 이런 인간적이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가운데, 리온과 스카드는 이번 결정을 만족스러워했다.

성 내에 더 이상 칸나를 둘러싼 소문도 없었으며, 그녀가 비밀리에 조직하고 있는 마법 기사단을 살피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칸나는 서쪽 성에 남은 사람들 중, 쓸만한 사람 몇을 곁에 두고 일을 해나갔다.


어차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

비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일은 미라를 통해서, 그 밖의 일들은 여관들을 통해서 하기로 했다.


제나가 죽었던 날, 스카드에게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 칸나는 이후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

어쩌다 성 내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눈길도 주지 않았으며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그런 칸나의 냉랭한 태도와 상관없이 스카드는 매번 예의를 갖췄는데, 그녀에게는 그 모습이 위선으로 보여 미움은 더 커져갔다.



'대낮에 남들 앞에서 사람 죽이고도 당당하네...'



그리고 스카드를 볼 때마다 그의 외모를 칭찬하며 좋아하는 여관들을 보는 것도 싫어졌다.

귀에 익은 별 거 아닌 소리지만 이제는 흘려듣지 못하고 속으로 울컥, 하고 반발이 일어났다.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공작이 사실은 미친놈인 걸 알아도 저렇게 좋아할까?'



하지만 공작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칸나와 다르게, 성 내에 있는 여관들을 비롯한 제르만의 사람들은, 이미 그가 냉철하고 무서운 성격에 가문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카드의 인기가 높은 것은, 그런 그의 성격과 별개로 아내였던 아델*에게 비교적 다정했으며, 그녀와의 결혼 기간을 비롯해 사별한 이후에도 아무런 염문이나 애인 없이 지내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아델 - 아델 가드니아 프로이센. 데미안 루이스 백작의 첫째 여동생이며, 스카드와 결혼했으나 난산으로 태아와 함께 사망했다.


공작이라는 높은 지위, 프로이센 가문에서 소유한 많은 부, 아름다운 외모, 여러 전장을 승리로 이끌었던 무력과 지력을 겸비했으며, 아내였던 아델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여인과도 스캔들이 없는 남자.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당연했다.


연애나 재혼 역시 일이 바빠서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외부에서는 그가 로맨티시스트라 아직 아델을 잊지 못해 혼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스카드의 연인 혹은 정부라도 되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땔감이 되어주고 있었다.



백설공주를 만나러 가는 길. 

이층 복도 계단에서 동쪽 성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스카드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쓰고 있는 칸나에게 눈치 없이 한 여관이 말을 붙였다.



"오늘 공작님께서 입은 저 푸른 옷이 참 잘 어울려요. 정말 멋지지 않아요, 왕비님?"


"...친놈인데.."


"예?"



칸나는 잘 안 들려 재차 묻는 여관에게 아니라고 돌려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프로이센 공작, 지금 백설공주를 만나러 온 거지? 그렇다면 난 있다가 저녁 식사 전에 다시 올게."


"아니.. 오늘 낮에 함께 공주님과 인형 파티를 하자고 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변경된 약속에 당황하여 묻는 여관에게,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스카드는 누군가 왕비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복도에서 반대편 계단으로 돌아 내려가려는 칸나의 모습을 보았다.



"........"



확실히 그녀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쓰이거나 불편하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스카드에게 중요한 건 칸나의 호감이나 비호감이 아니었으니까.

더 이상 엘레나의 일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스카드는 엘레나가 살아있을 무렵,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을 해 왔던 사람들 중 소문에 관련되어 있는 자를 찾아내서 축출했다.



예전에도 이미 처리했던 문제.

남아있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하긴..

그땐 무슨 정신으로 일을 처리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빠른 걸음을 옮기던 스카드는 고개를 돌려 칸나가 지나간 자리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기억이 선명한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리자, 지난 밤 늦도록 골몰하던 일이 생각났다.




.......


"현 에크나르프 국왕 아르센은 외동아들."

"그의 아버지인 라울도 마찬가지였고."

"혈통에 대한 집념이 누구보다 강한 나라에서, 사생아가 있다 한들 밖으로 버려두진 않을 텐데.."



스카드는 책꽂이에서 역사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르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에크나르프 역사서.

자신의 아버지가 사절단으로 갔을 때 어렵게 구해온 책이었다.



에크나르프는 에토르 전 대륙 가운데 마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땅이었다.

마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호의적인 것도, 마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나는 확률이 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에크나르프인들에게 마녀에 대한 차별은, 내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차별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마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그 힘이 미비한 경우가 많았고, 성인이 되면서 그마저도 사라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또 에크나르프는 유일하게 마나 광산을 소유한 국가였다. 

그곳은 마력이 담긴 마나를 채굴할 수 있었지만, 광산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너무 강해 일반 사람은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고자, 나라에서는 그 주변에 출입금지 푯말과 함께 결계를 쳐두었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대륙의 마력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지 않고 가장 고요한 1월 초, 에크나르프 왕실은 연례행사를 했다. 


높은 마력을 지닌 마녀들을 선발해 광산의 마나를 채굴하도록 했는데, 이때 채굴한 마나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에크나르프 땅 곳곳에 묻으며 그 땅을 축복하는데 쓰였다.

그 덕분에 에크나르프는 넓게 펼쳐진 비옥한 평야에서 자국 내에 생산하는 과일과 곡물로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생명력이 풍부한 나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좋은 품종의 물자를 생산하여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고, 나라와 왕실의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높은 마력을 지닌 마녀들이라 해도, 채굴을 다녀온 뒤엔 몇 년 못가 병이 생겨 죽고 말았다.

왕실은 유가족에게 위로금이라는 명목으로 보상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마나 채굴에 지원하는 마녀들은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희생을 나라의 발전으로 쓰는 기괴하고 잔인한 이 행사는, 마력을 지닌 초대 왕족, 다니엘 베로크비스가 왕으로 추대되며 끝이 났다.


선정을 베푼 왕으로 명성이 높았던 다니엘 아르젠 베로크비스.

그에 관한 것은 정치학을 공부했던 때에 여러 번 읽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스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들고 소리 내어 읽으며 자신의 의문에 답을 찾으려 애썼다.



"어느 해, 가장 크고 품질이 좋은 마나가 채굴되었다. 마녀와 세공사들은 마나를 보석처럼 가공해 왕관을 만들어 헌상했고, 이후 왕비가 된 미셸의 결혼식에 쓰였다. 그녀는 임신 후 열린 왕실 행사에서 다시 왕관을 쓰고 마녀들에게 축복과 보호 마법을 받았는데..." 

".....태어난 아이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은발머리, 저 먼 이국땅의 빙하와 같은, 아쿠아마린 색의 눈동자를 지녔다."


"왕이 된 다니엘은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이 제물이 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였고, 마녀들을 죽음이 아닌 삶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정책을 만들었다..."

"....이 후로 왕실 안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마력과 함께 은발 머리와 옅은 벽안을 지니고 있다......"



에크나르프는 마력을 가진 왕족의 수가 늘어날수록 현 세대에 존재하는 왕족 전체 마력의 힘이 나누어지는 특성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우려해 사생아를 두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며,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왕실에서 데려와 관리하고 보호해 왔다. 

*마력을 가진 왕족이 죽는다 해도 남은 사람들에게 힘이 증가되거나 재분배 되는 일은 없다.


수백 년에 하나쯤, 에토르 대륙 전체를 통틀어 신이 허락하는 특별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전설이 있었으나 진짜인지는 알지 못했다.

본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리온이 데려온 건, 단순한 마녀였을까.. 특별한 마녀였을까.. 아니면 숨겨진 왕족일까..."



그는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의혹과 상상에 끝을 내고 싶었다.

(에크나르프인인 아버지를 둔) 수석 집사 론을 불러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고, 그는 공작님의 의심은 무리한 추측은 아니라면서도 선을 그었다.



"에크나르프 왕족이 아니어도 옅은 벽안의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 있었습니다. 물론 은발과 보석 같은 벽안을 모두 지닌 사람은 에크나르프 왕족 외엔 없었지요. 다만 왕비님이 사생아든 뭐든 왕족이라면, 에크나르프 왕실에서 모를 수가 없습니다."



스카드가 론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분이 문제가 되는 걸 뻔히 알면서, 왕족이라는 방패를 내려놓고 천대받는 마녀를 데려오진 않겠지. 게다가 왕국 간의 국혼이라면 리온이 원하는 대로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될 테고."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스카드는 왜 이런 의심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에 잠긴 그를 보던 론은 매일같이 바쁘게 일하는 스카드가 염려되었다.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드시라며 와인을 한 잔 권하고 따라주었다.



"이미 잘 아시는 분께서 뭘 더 의심하고 계십니까."



와인잔을 들어 창 밖의 달을 담던 스카드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미소로 론에게 말했다.



"아직 칸나 왕비의 진짜 머리색을 보지 못했거든."



왕실에서 꽤나 문제가 되었던 칸나의 머리색.

귀족들에게까지 번진 이 들불 같은 문제는 귀부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야 진화가 됐었다.


스카드는 론이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뒤, 그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리온과 함께 칸나를 만나러 갔던 기사들 중, 우리에게 정보를 줄만한 사람을 알아봐. 그리고 에크나르프 위베르 후작에게 칸나의 초상화를 건네며 그런 왕족이 있는지 확인 한 번 해주고."


.......




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성 안은 평화로웠다.


자국 내 제대로 된 세력도 없는 칸나에게 귀족들이 더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그녀 또한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

그들 눈에 칸나는 이제 '왕실의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은 얌전한 왕비' 정도로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들 몰래 마법 기사단 육성으로 계속 바쁘게 지내왔었고, 필요한 광물이나 약초, 희귀한 물자들은 난쟁이들을 통해 조달받았다.

칸나는 마법 기사단 창립 이전부터 난쟁이들에게 성 안으로 들어와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지속적으로 했었지만, 그들은 끝끝내 거절하고 외부에서 그녀를 돕는 조력자로 남기로 했다.


그렇게 지나가던 평화의 시간은 무역선 침몰로 인해 브리텐드와 갈등이 심해지면서, 나라 밖 정세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 세우게 되었다.




<에필로그>



스카드가 있는 시간을 피해 백설공주를 만나러 간 칸나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마마!"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움.

그래.. 네가 그런 인간과 같은 집안의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아니, 아니지.

넌 오토른 가문의 아이니까.

그런 삼촌과는 다를 거야.



"꺄아~"



둘이서 즐겁게 인형으로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백설공주가 작은 곰인형을 가져오더니 "트카두" 하고 말했다.



"....?..."


"트카두."


"아... 삼촌이라는 거야? 스카드 공작?"


"웅."



칸나는 해맑게 웃는 백설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신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백설공주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손에 들고 있던 토끼 인형으로 곰인형을 들이받았다.




<에필로그 2.>



회의에, 파티 주최에, 마법 기사단 일까지...

힘든 하루에 지쳐 방으로 돌아온 칸나는 이대로 눈을 감고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이렇게 힘든 날에는 더 생각이 나는 지오니의 일기.

간신히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아 한숨 돌린 칸나는 열쇠로 잠그는 서랍 안쪽에 두었던 일기를 꺼냈다. 


'열두 살 이후' 라고 적힌 일기장.

칸나는 그 안에서 책갈피로 표시해 둔 부분을 찾아서 읽었다.



'칸나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론 더러운 일도 있고, 무서운 일도 있단다.'

'길가의 똥은 밟지 말고, 눈앞의 미친놈은 피해야, 더러운 일과 무서운 일을 최대한 덜 만날 수 있어.'



칸나는 지오니가 이 글을 썼을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 엄마도 특이한 사람이긴 해."



칸나는 그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찾아 읽으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만났을 땐, 도저히 피할 수 없었을 땐, 엄마가 너에게 알려준 모든 방법을 통해서 살아남아야 해.'

'설령 그게 남을 해치는 일이 되더라도 말이야..'



칸나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일기장을 덮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해치더라도 말이지....."

이전 12화 12. 거울아 거울아 (Mira? Mirro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