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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Oct 07. 2024

12. 거울아 거울아 (Mira? Mirror?)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오후에 복도에서 칸나를 만난 스카드가 귀족들의 일을 이야기하며 사과를 건넸다.

미라에 대한 궁금증. 

그저 단순 호기심으로 보였던 일이 회의장에서 꽤나 시끄러웠던 모양이었다.



"......."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럴 때는 웃는 게 낫겠지, 싶어 칸나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미소로 괜찮다고 답했다. 


그런데 웃는 모습이 어정쩡했던 걸까? 스카드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재차 사과했다.

품위 있게 관용을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정중하게 다시 사과를 하다니.


당황한 칸나가 스카드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제 얼굴... 이상했나요?"


"네?"


"아니, 제 표정이... 이상한.... 이상... 그렇게.."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본 스카드가 환히 웃었다. 


지금은 자신을 배려할 상황이 아닐 텐데.. 재밌는 분이네, 하는 생각에.

그리고 스카드의 웃는 모습을 본 칸나는, 그동안 여관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의 외모를 처음으로 제대로 본 것 같았다.



어라, 진짜 미남이구나. 아차.. 유부녀가 이런 생각은 좀 과한가?

아니... 근데 미남은 미남이니까.

뭐....



"왕비님?"



잠시 멍하게 있는 그녀를 본 스카드가 조심스레 불렀다.

그리고 칸나는 자신도 모르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예, 미남."


"?"



'내 입이 미쳤나?!'



칸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졌고, 의아한 얼굴로 눈이 커진 스카드에게 얼른 사과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의 예상 밖의 모습에 놀란 것은 스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녀의 발걸음을 쫓으며 의문을 되짚었다.



어라..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분 나쁘다고 할 줄 알았는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모르는군."



영리한 스카드는 이내 칸나가 귀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소문을 들었다면 아까처럼 웃으면서 자신을 대할 수는 없었을테니까.




.......


회의실에 들어서려던 순간, 스카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먼저 와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 칸나를 씹어대는 그들의 목소리. 

자신의 할 말만 해대며 시끄럽게 울려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그 내용이 오늘따라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귀에 거슬렸다.



"왕비님과 그 기사가 가깝다는 소문 들었습니까?"


"마술인지, 흑마술인지 사용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누군지도 모를 인간을 성에 들여서는."


"밤에 둘이 만나는 것을 본 자가 있다고요?"


"왕비가 되어서 몸가짐도 바로 하지 못하다니."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밝혀서 처벌해야 합니다!"



헤르나를 통해 대충 알고 있던 성 내의 소문이 이제 귀족들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짖어대는 그들의 말은, 리온의 자존심과 칸나의 명예에 칼을 대고 있었다.


특별히 신경 쓸 필요도 없던 귀족들의 가십거리 밝히기.

그러나 평소와 달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떠도는 소문 중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엘레나를 떠올리게 하니까.

리온에게도, 스카드에게도.


스카드는 당장 들어가서 그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한 놈이라도 목이 떨어져 나간다면 다들 그 입을 계속 놀릴 수는 없겠지..



"하...."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들어간 회의장.

떠도는 뒷소문에 괜히 리온을 자극하지 말자는 결의가 무색하게 이후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




칸나는 백설공주가 좋아하는 간식을 들고 동쪽 성으로 향하던 도중, 정원 구석에서 여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기에는 외면하기 힘든 이름, '미라' 와 함께.



"미라..?"



그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여관들에게로 옮겼다.

재잘대는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함께 있던 여관들을 뒤로 물리고 혼자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모인 곳에서는 낯선 여관 세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브리텐드 출신의 여관인 리사가 몹시 흥분해서 말을 꺼냈다. 

칸나가 거울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며 말이다.



“분명히, 거울아 거울아~(mirror mirror)하고 불렀다니까요? 우리나라에선 그건 거울이라는 뜻이에요.”

“커튼 안쪽에 대고 거울아~ 거울아~ 하고 부르면서 뭔가를 이야기하더라고요.”



중년의 여관인 사라는 설마 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못 믿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그럼, 왕비님이 거울이랑 이야기한다는 거야? 왜?”



리사는 이제까지 이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꽤나 높은 호응을 얻었기에, 사라도 얼른 자신에게 감탄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야! 뭐... 아니, 뻔한 것 아니겠어요? 뭔가 마법을 걸었겠죠.”

“지금이야 아무도 얘기 안 하지만, 왕비님 마녀잖아요. 흑마술도 사용할지 누가 알아요?”



흑마술이라는 소리에 사라도, 함께 있던 다른 여관인 제나도 두 팔을 감싸며 몸을 떨었다.



“어휴, 무서워...”


"정말 흑마술을 사용하면 어쩌죠?"



달라진 두 사람의 태도에 의기양양한 리사가 이번에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제나에게 물어보았다.



“저도 그래서 뮐러 후작님께 엄청 이상하다고 얘기했어요. 참, 근데 왕비님의 남자 얘긴 또 뭐예요?”



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나에게 사실 여부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재차 질문을 했다.



“맞아. 성의 서쪽에서 일하는 앤의 이야기를 들으니 못 보던 어떤 큰 사내가 돌아다닌다던데?”



이번에는 제나가 자신이 아는 정보에 신이 나서 고개가 한껏 올라갔다.

그녀는 손짓까지 해가며 열심히 미라의 모습을 설명했다.

물론 제나가 미라를 제대로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맞아요. 저도 봤어요. 낮에는 잘 안 보이고, 밤에 돌아다니더라고요.”

“덩치도 커요. 키도 6피트가 넘던데요?”

"어깨도 넓고... 칼을 차고 있는 걸 보니 기사인 것 같기도 해요."



제나의 이야기를 들은 리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성 안에 낯선 이가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고, 얘기도 나눠본 적이 없다는 게 호기심과 함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사가 성 내의 사람은 아무나 뽑지를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알지 않느냐며, 여관 경험이 오래된 사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수도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일까요? 왕비님 친척인가?”



그러나 사라도 온몸을 가리고 다니며 단서 하나 주지 않는 사람을 추측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 자신에게서 관심이 옮겨간 것 같아 서운한 제나가 다시 모두의 흥미를 끌만한 일이 생각난 듯,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있잖아요~ 실은.. 돌아가신 왕비님도 예전에 성 내에 있던 하얀 병사.....”



제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비님! 하며 큰 소리로 칸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떨어질 듯 놀라서 돌아보니 바로 한걸음 뒤에서 스카드가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왜 몰랐지?'

'기척도 없었던 것 같은데...'



칸나가 대답조차 못하고 있는데, 먼저 그녀를 발견한 여관들이 다가와 칸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왕비님..."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화는 칸나가 아닌 스카드가 난 것 같았지만,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태연한 척 시선을 여관들에게 두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여관들 앞으로 섰다. 

그리고 최대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이름은 미라 아르투아다. 출신은 그대들이 알 것 없고.”

"거기. 내가 거울이랑 대화를 한다고 했나? 흑마술이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지어낸다면, 큰일이 날 텐데."



어떻게 보면 필요도 없는 해명이지만 이들에게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잠시, 왕비인 자신이 이렇게 대놓고 거짓 험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불쾌했다.



“잘못했습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왕비님....”



거울과 이야기를 한다.. 

어이가 없군.


흑마술.. 

마녀 토벌의 가장 큰 도화선이 되었던 타크 후작의 반란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저주라도 건다는 이야기일까?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할 이야기들을, 자기들끼리 소문을 내고 귀족들에게 전하다니.

이들을 어떻게 벌주어야 다른 이들에게도 본보기가 될까.



"일단, 다들 일어나."



오들오들 떨며 서 있는 그들이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소문의 출처를 하나하나 밝히고 나서, 감옥 청소라도 시켜야 할지 고민하던 칸나의 곁에 스카드가 다가왔다.



“왕비님께 이들이 무례를 범했군요. 처벌은 왕비님께서 하셔야 마땅하지만... 전하께 이 일은 제가 단속시키겠다 약속한 터라, 실례하겠습니다.”



세 명의 여관들 앞에 선 스카드는 왼손으로 어깨에 두른 망토를 펼쳐 칸나의 시야를 가렸다. 

그는 재빨리 오른팔을 뻗었고, 이내 비명소리도 없이 제나가 앞으로 쓰러졌다.



“피가 튀진 않으셨는지...”



스카드의 말투는 칸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으나, 돌아보는 얼굴은 몹시도 개운해 보였다.



회의장 문 앞에서부터 들려온 불쾌한 소문.

엉망진창이 된 회의.


여전히 세상물정을 모르는 칸나 왕비.

...그리고 아직도 엘레나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의 손에 들고 있던 단도에 묻은 피는 정원의 잔디에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고, 칸나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충격에 잠겨 제대로 내뱉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죽어가는 제나의 호흡만 애처롭게 공중에 퍼지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참담한 광경.

이런 상황을 앞에 두고도 살짝 올라간 스카드의 입꼬리..

칸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죽었다.


지오니의 죽음 이후 처음 보는 사람의 죽음. 

아니, 살해.



칸나는 어렵사리 정신을 차리고 제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자 손이 떨렸다. 

칸나는 제나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짧게 안식을 기도했다. 


분노? 슬픔? 이건 무슨 감정일까.

칸나는 일어서서 공작에게 물었다.



“... 누굴 위한 거였나요.”



스카드는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왕실의 안녕과 두 분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



칸나는 점점 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단속할 수 있었습니다.”


“왕비님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어야하니까요.”


“죽일 생각이 아니었어요!”



분노로 소리치는 칸나를 보고도 스카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까 전의 웃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처음 그녀를 성 안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압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확실하지 않습니까? 남은 두 사람도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고.”



스카드는 남은 여관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너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도.”


“네, 네...”



덜덜 떨고 있던 두 사람은 꾸벅 인사를 하고 제나의 시체를 일으켰다. 

목에서부터 흐르는 피로 온통 물든 제나의 옷은, 입조심을 하지 못한 자의 결과이자,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경고였고, 칸나에게도 경고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든 이와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보여주는 경고.

살인이 최선책은 아니지만, 스카드는 그가 가진 여러 방법들 중에 얼마든지 이걸 선택할 수 있다는 경고.


칸나는 여관들이 모두 떠난 뒤,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을 붙잡아 스카드에게 제기했다.



“왜 저 여관이 죽어야 했나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질문한 건.. 어째서, 굳이, ‘저 여관’ 이어야 했냐는 겁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스카드는, 칸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녀의 입을 막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똑똑한 공작님이라면 제 질문의 의도를 잘 알 겁니다. 설마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 와서 다짜고짜 목을 벤 건 아닐 테고.”



칸나는 스카드와 독대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는 늘 서늘한 얼굴로 칸나를 보았다. 


모든 귀족들이 합심하여 그녀를 공격할 때에도 그는 말없이 칸나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만 있었다.

스카드가 나설 때는, 칸나가 공격을 받을 때가 아니라 리온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귀족들과 언성이 높아질 때였다.


마녀로 왕비가 된 자신은 별로 안중에도 없는, 고고하고 높은 귀족.

할 수만 있다면 칸나는 그와 마주치는 일을 최대한 피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얼굴에 튄 핏방울도, 그의 옷과 손에 묻은 핏자국도, 칸나의 심장을 꿰뚫을 듯한 그의 독기 어린 눈동자도 모두 칸나의 숨을 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죽음은 스카드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설마 왕비인 자신까지 당장에 칼로 찌르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에 칸나는 그에게 더 따져 물었다.



“문제가 되는 발언의 근원은 ‘브리텐드에서 온 여관’ 이었습니다. 아닙니까?”


“그러나 공작님의 칼에 맞은 건 다른 쪽이지요.”


"......"



스카드는 자신을 파고드는 이 어린 왕비가 불편했다.


그저 상승한 신분을 방패 삼아 조용히 호사나 누리며 아이만 잘 키우면 될 것을.

계속해서 리온과 무언가를 꾸미는 것 같아 불쾌했다.


예의라고는 하나도 배우지 못한 환경에서 왔으니 성장하는 것이 더딜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똑똑한 것 같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녀의 출신과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품위를 볼 수 있었다.

왕비 교육을 통해 어설프게 배운 품위와는 다른 느낌.

마치 타고난 귀족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을 누를 수 있는 기세가 있었다.



너는 리온의 편일까.

너 자신의 편일까.

백설공주는 너에게 어떤 의미일까...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칸나는 사건을 명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리고 스카드의 행동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스스로 밝히기를 강권하고 있었다.


물론 스카드는 칸나의 질문에 원하는 답을 해줄 리 없었다. 

대신 연약한 그녀의 심성을 파고드는 말들로 대답했다.

차가운 미소도 덧붙여서.



“덕분에 왕비님의 소문도 성 내에서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기뻐하세요.”

“그리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브리텐드에서 온 여관은 뮐러 후작이 성으로 보낸 터라 기회를 한 번 더 준 것입니다. 입단속은 충분히 되었을 거고요."

"뭐.. 그게 싫으시면 지금이라도 가서 죽여드릴까요? 아, 이왕이면 남은 하나도 마저 처리하는 것이 좋겠네요.”



죽인다고?

남은 두 사람도?



칸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촉촉해지는 눈가는 스카드의 말에 많이 상처를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충격으로 인한 슬픔일까. 

아니면 참을 수밖에 없는 분노일까.



스카드는 칸나의 양심을 담보로 거래를 하고 있었다. 독하고, 잔인하게.

누군가 더 이상 죽길 원치 않았던 그녀가 물러날 수밖에 없는 협박성 제안. 


칸나는 아직 스카드처럼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스카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칸나의 입술을 보고, 경계를 풀었다. 

이내 그녀에게서 냉정한 눈빛을 거두고, 눈을 피해 자신을 쳐다보지 않도록 했다.



어라..

나..

여자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왜인지 스카드는 울 것 같은 칸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옅은 푸른색 눈동자는 눈물 탓인지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그의 어둡고 냉정한 속을 뚫고 그 안을 낯설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제가 과했습니다."



스카드가 이쯤 하고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더는 왕비와 기싸움을 벌여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아직 칸나는 자신에게 맞설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걸 충분히 알았다.



'상대도 되지 않는 사람을 위협하는 건 비겁한 일이지.'



"왕비님... 이건 전하께서 부탁하신 겁니다."

"저는 명령대로 했을 뿐."


"리온...?"



리온이 왕비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독이 되는 소문을 찾으면 죽여 없애라고 했다는 말일까.


칸나는 차마 다시 물을 엄두도 나지 않아 손을 들어 그만하자는 표시를 전했다.

그리고 후들거리며 쓰러질 것 같은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서 스카드에게 강하게 경고했다.



“다시는 성 내에서 허락 없이 칼을 휘두르지 마십시오.”



칸나의 말을 들은 스카드는 얘기가 이쯤에서 마무리된 것에 만족하며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날은 끔찍한 날이었다.


칸나는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죽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했던 그 일은 이후에도 계속 일어났다.


그래서 칸나에게는 생명을 지킬 힘이 아니라, 죽음을 견디는 힘이 있어야 했다.

눈앞의 죽음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평정심과 함께.




<에필로그>



집에 돌아온 스카드는 계속해서 칸나의 울 것 같은 얼굴이 생각났다.


그건 그녀가 단순히 미인이라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감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뭔가 자꾸 떠오를 것 같은 애매함에,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책상 앞에 앉아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도 계속 그 눈과 얼굴을 생각했다.



"확실하게 기억이 안 나는군..."



옅은 벽안.

그런 눈동자가 한 둘도 아니었을 텐데 왜 자꾸 생각이 날까.


눈물 때문에 반짝거려서?

...우습군.


다만 칸나의 눈동자는 일반적으로 푸른 눈동자를 지닌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그 색깔은 마치...

먼 이국 바다의 빙하를 닮은 듯했고, 아쿠아마린이라는 보석을 닮은 듯했다. 

맑으면서도 아름답게 푸른......


.......


....?.....


생각이 멈춘 스카드는 혼란스러움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에크나르프 직계 왕족의 특성 중 하나였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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